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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공간론'를 읽고

작업 노트 28

by 사과와 돌멩이


24.12.18



야스나가 히로시安永浩 선생의 책 [팬텀 공간론], [팬텀 공간론의 발전], [정신의 기하학]을 읽었다. 처음 읽기 시작한 이후로 중간에 잠깐 멈췄지만 숙성의 시간이었다는 데 여운을 느낀다. O.S.Wauchope의 [Deviation into Sense]와 더불어 내용을 정리할 예정이다. 섣부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성급함 보다는 조절이랄까 요리 도중 간을 보는 행위와 같다. 그냥 일반적인 책거리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성급함이라고 하면 다른 데에 있다. 히사오 선생의 책을 읽기 위해 시작된 이 여정에서 전인적인 해상도를 높이고자 더듬던 와중 발견한 Wauchope와 야스나가 선생을 우선으로 삼았기에 아직 히사오 선생의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여기서 하루빨리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세를 잡는 게 바로 성급함이다. 여태 나는 성급하게 책을 읽는 버릇으로 나 자신을 축소시키는 우를 범했으니, 이제는 조절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후 정리하며 보다 읽는 이에게 맞춘 글을 쓸 예정이라 이 지면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독후감이기도 하니 읽는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좀 써볼까 한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해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덜컥 '이해의 장벽'에 가로막혔던 부분은 정신의 체험 공간-팬텀 공간을 도식으로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나에게 있어 가장 난도가 높았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림 3-5.png 추후 다룰 글에서는 출처를 명확히 기재하겠다. 해당 도식은 [정신의 기하학]에 수록되어 있다.

Wauchope의 '패턴'을 도식화한 기하학은 단순한 직선이기도 해서 이해에 큰 무리는 없었다('전체'를 이해하고 다시 '부분'으로 돌아가는 '패턴적 사고 방식'을 진행해 보니 여기서 큰 무리가 없었던 게 함정이었다...). 야스나가 선생은 점차 이를 벤의 도식을 참조해 삼각형으로 차원 확장을 나타낸다. 공통 교육 과정을 이수한 이에게는 익숙할 법한 '벤 다이어그램'의 바로 그 '벤'이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어떤 착상의 문맥이 있는지 추론하지 못한다. 그저 갑자기 위의 도식 3-5가 떡 나타났을 때 콱 막히는 기분을 느끼곤 '안되겠다...' 싶었을 뿐이다.


도식 3-5는 정상적인 a-a'계의 체험 선이 모종의 외압으로 인해 a'계의 탄성률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방식으로 체험이 어그러지는지를 도식화한 것이다. 야스나가 선생의 설명을 따라가면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잘 포장된 고속도로는 절대 아니다. 일단 모국어도 아니기에 의미의 정교화를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약간의 핸디캡(해당 책에서 묘사한 (a)의 가설적 장애와 마찬가지로 거리가 이동되어 흐릿함이 증가된 지각처럼...?)으로 현상학적 내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Wauchope가 맞았고, 야스나가 선생도 맞았다. 결국은 도달된다. 내가 그의 도식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나와 그, Wauchope가 인정하고 있는 유일한 공리 덕분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 이것을 나의 이해로, 저 도식 3-5가 어떻게 분열증의 정신 상태를 그리는지를 간단히 설명해보려 한다.






본격적인 내용은 추후 다룰 글에서 말할 것이므로, 축약하자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곧 의식이 현실을 인식한다는 것과 같다. 이를 간단히 S와 P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저 S는 P다라는 걸 이해하는 것으로 '출발' 자체는 더 이상 흔들릴 필요가 없어진다. 지금 이 말을 적으면서 느끼는 바, 나는 '패턴'을 익힌 정신과 덜 익힌 정신 간 시야가 다를 수밖에 없음을 포착한다. 처음 내가 Wauchope와 야스나가 선생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들이 '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한 몸이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눈이라는 걸 이제 막 가져본 인간에게 '저걸 봐, 알아볼 수 있지?'라고 묻는 상황과 닮았다. 무언가를 볼 때 눈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입장과 이제 막 눈을 가졌기에 일단 이 눈에 적응하는 데 에너지가 요구되어 결과적으로 '본다는 행위' 자체를 배우는 입장에는 막대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문장에서 Wauchope와 야스나가 선생은 '살아있음'을 하나의 공리이자 '출발'로 포착함과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자아의 존재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는 게 위의 비유로 말하면 바로 '눈'이다. 나는 바로 이 '눈'에 해당되는 걸 아직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기에 우선 이걸 제대로 이해해야 했고,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똑같이 '부정할 수 없는 자아의 존재에 의한' 것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걸 '이해했어야' 했다.


이것이 유일한 공리다. 진리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 "신", 어떤 정신적 신비 등이 우리 인간에게 '왜-어떻게' 나오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눈'이 된다. 동시에 그것의 '오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둘은 한 몸이기에 주어져 있으며 Wauchope의 말마따나 '누구나 할 수 있다'. 나(같은 유형)의 정신 입장에선 무엇보다 "부정할 수 없는 자아의 존재에 의한" 게 뭔지를 제대로 알아야 비로소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추후에 다룰 글에서 나오겠지만 이는 E형 인간, 분열기질자, 한때 철학 계보 중 하나였던 '생 철학-실존 철학' 등의 '팬텀 자세'를 가진 자에게 주어진 체험 패턴의 프로세스로 보인다. 이걸 알고 나면 왜 조현병 환우들의 망상 장애나 의식 장애, 파라노이아, 피해 망상 등의 '내용'이 '당하는, (누군가)시키는, 사로잡히는' 코드를 따르는 내용으로 채워지는지 또한 설명할 수 있다. 이 설명의 '사실적 우위'는 야스나가 선생도 말하듯 '사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는 데 안심이다'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으며, 또 '나'의 근원이자 '유일한 고유성'을 자아내는 그것이기에 우리는 '자유'를 발산할 수 있다. 의지도, 자발성도, 체험도 가능하다. 즉 한 몸이기에 '부정할 수 없다'는 감각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할 수 있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 내 안이 아닌 밖에서 그대로 작동한다면? '할 수 있음'은 '할 수 있어야 함'으로 입력될 것이다. 인간 인식의 코드가 '할 수 있어야 함'으로 초기 입력값이 설정되면 그 이후로 결합되는 표상이나 지각, 상이한 강도의 인식들이 기존에 외부 주체=타자를 인식할 때 접수된 출력들의 거울이 될 수밖에 없다. 즉 타자의 자발성을 한 개인의 주체로 '볼 때' 그 자발성은 대개 강요-강제의 코드를 띤다. 쉽게 말해 '능동과 수동은 동전의 양 면'이다.


이러한 이해가 있을 때 돌아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출발로 삼고 있다는 자명함이 드러난다. 자기 자신을 출발로 삼고 있기에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며, 살아 있기에 자기 자신을 출발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두 갈래를 따르는데, 하나는 논리적 경로로 '자아, 자기 자신, "나"' 따위의 '자아 도식'을 세워 일종의 '자의식'을 표상으로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출발로 삼고 있다'고 할 때의 '자기 자신'이 아닌 이미 출발로 삼았기에 가능한 의식 활동의 '결과'다. 다른 갈래는 자성적 경로로 체험을 통해 '이해의 순간'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출발로 삼고 있다'고 할 때의 '자기 자신'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정신의 '감응'이다. 전자는 후자를 위해 필요하며, 후자는 전자의 출발이다. 이 관계를 '이해한다'는 건 곧 '패턴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로 이해될 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출발로 삼는다'는 부분으로 이해되고, 그 '이해'가 의식이 현실을 인식한다로 ← 이해된다. 패턴은 쉽게 말해 양 방향, 그러나 동일한 것이 아닌 (그렇다고 변증법은 아닌) 기묘한 순환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회귀나 '무한', 호프스태터가 [괴델, 에셔, 바흐]에서 탐구한 '영원한 황금 노끈'을 인식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패턴이란 A←→B로 축약 가능하다. 다만 이렇게 해버리고 나면 앞선 도식 3-5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도식'에 사로잡혀 그 '의미-체험'을 놓칠 수 있다. 그러니까 패턴의 설명도 어쩔 수 없이 '패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패턴적으로란 말은, 체험적이라는 말과 같다. 여기서의 체험이란 자신의 '이해의 순간'을 감응할 수 있음이며, 그 질적 상태가 출발이어야 양적 표현도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한때 나의 탐구 대상이었던 '재귀성'이나 '자기-지시'를 가장 '이성적으로' 이론화한 게 Wauchope의 '패턴'이다. 그만한 간결함과 정교함은 여태 발견하지 못했다. 마뚜라나 바렐라 선생도 결국 같은 걸 말하고는 있지만, 미완인 부분이 많고 무엇보다 단순함의 기교로 따지면(이건 사실 '전체'를 의미한다) Wauchope의 '패턴'이 상대적으로 뛰어나다. 여하간 이러한 패턴 이해도가 올라가 비로소 의식적인 '패턴 사용자'가 되었을 때, '그런 눈'의 사용법이 익숙해졌을 때 이 도식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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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반적인(정상적인) 팬텀 공간 도식이다. a는 '자기 자신'이고 b는 '대상'이다. 패턴 A←→B는 보다 한꺼풀 벗기면 A→A'(B)→A''(B')→A'''(B'') ...... 로 표현 가능하다. 지금의 내 정신은 '체험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이 절차를 단 번에 이해하지만, 만약 패턴 감각이 덜 익혀진 입장에서 이 설명을 볼 때 어떻게 부분→전체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A에서 → 로 표기되는 걸 번역하면 '자기 자신(A)으로"부터(→)"다'. 2) A'(B)는 원래 B다. 그러나 그것을 A'(B)로 표현한 것은 앞서 패턴 A←→B를 한꺼풀 벗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정신이 '왼쪽과 오른쪽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유명한 역설과 같은 것이다. 쉽게 말해 한 번에 하나씩 하다가(부분과 부분) 어느 순간 그것들이 하나가 되면(전체) 우리는 그 이후에 그 '하나'를 다시 '한 번에 "하나"씩' 할 때의 바로 그 '하나'(전체→부분)로 삼는다. 이것이 '재귀성'-'인과성'의 역설로 알려진 무수한 명제들의 정체다. 닭이 먼저냐 닭 알이 먼저냐? 이 논쟁의 핵심은, 창조냐 영원이냐라기보다 재귀성을 인과성으로 바라보거나 인과성을 재귀성으로 바라볼 때에 있다.


중요한 건 우리의 '공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렇기에 패턴이 나타날 수 있고,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앞선 2)에서 B가 A'(B)로 바뀐 건 A→, A→, A→, ... '이해의 순간'으로 하나가 된 B가 A→로 될 때의 '부분'이다. 다시 말해 '출발'은 있되, 그 끝은 정해져 있지 않다(이것은 '무한'이다). 무한은 우리가 인식함으로써(출발함으로써) 시작되는 '한 없음'이다. 삶과 죽음의 관계도 이와 같다. 죽음이 하나의 관념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토어가 무한론을 다룰 수 있었던 것도, 왜 그가 정신병에 걸렸는지도 이제는 '체험적으로 감응된다')


따라서 패턴 A←→B란, 어디서 출발하든 출발된 선상 위에서의 진행이므로 그것을 '전체'로 말할 수 있다고 해도 부분과 같다. (여기서 칸토어의 무한론을 참조해도 좋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무한을 비교'했는지는 곧 패턴 간 비교와 같다) 위의 팬텀 공간 도식 3-1에서 a는 '자기 자신'이고 b는 '대상'이라고 했다. 그때 a와 b는 패턴 관계를 갖는다. 그 선은 a≥b를 지키므로 빗변이 그어진 삼각형을 그려낼 수 있다. 즉, 우리의 '체험'은 삼각형 XYZ의 부피다. 여기서 선분 XY는 패턴 a→b다. 단순 '도식'만을 보면 그것은 그저 선분일 뿐이다. 그러나 '체험'으로 출발해야 한다. 배가 고파져 무얼 먹을까 고민한다, 출근하기 싫다, 날씨가 추워 운동하기 싫다, 누워있고 싶다 등 생활 욕구를 넣든, 이 시국에 다음 대통령은..., 시위에 참여해 현장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 등 현실 지각에 기반한 상황 의미 부여를 넣든 '체험 공간'은 늘 a≥b 유지하는 삼각형 XYZ의 부피로 '도식화'할 수 있는 패턴 a→b를 띤다.


이때 b를 a'로 전환해 동일한 도식을 그리면, 그것이 '팬텀 공간'이다. 이것은 추후에 다룰 예정이다. 여하간 핵심은 이렇다. 도식을 바라볼 때 도식만을 보면 왜 야스나가 선생이 이런 '도식'을 그려놓고 '필요한' 설명만 해놨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다 이해하고 나니 '아니 쌤... 이걸 이렇게 먼저 설명했어야지' 하는 아쉬움이 군데군데 있었다. 하지만 이건 사소한 것이다. 패턴의 공리를 다시금 떠올리면,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이때의 '자기 자신'이 B의 위치에 놓이면 그는 배우지 못하는 함정에 빠진다(이건 자의식 과잉이나 나르시시즘, 관심 종자 따위 등의 인간 면모를 자아내는 정신 가능태 중 하나로 보인다). 우리는 살면서 늘 자기 자신을 A에 위치한 것으로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무언가를 배우기도 하고 보다 체험을 확장할 수 있다. 이번에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공간론'을 읽고 난 뒤 나의 이해로 말하자면, 팬텀 공간의 발달은 분명 여기에 힌트가 있다는 것이다.(그의 이론을 읽고 나면 문득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조현병 환자는 정말로 '회복'이 불가능한가?라고 말이다. 오늘날 현실에는 일단 그런 건 불가능한 입장이다=쉽게 말해 입증된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확장된 나의 인식으로는, 애초에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결론이다. 물론 이해 당사자가 됐을 때 과연 나는 무얼 할 수 있는지는 체험의 영역이므로{어머니가 암에 걸려 간병할 때의 '내 정신'을 그 전에 예상할 수 없었듯이} 지금은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나 우리네 정신의 '팬텀 공간'이 이해될 수 있을 때 분명 우리의 무의식-비의식-의식 간 관계망도 부분적으로나마 도식화가 가능하다. 나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살아가면서도 '모르게' 알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림 3-5.png


돌아와 다시 말해, 내가 이해 난관에 봉착했던 건 이 도식에서 a와 a' 간 관계가 도대체 무엇이며(단순 선분으로는 알 수 있는 게 없었고), 그 연장선으로 대응되는 2차원의 면적과 '체험'이 어째서 '패턴 역전'이며, 실제 임상 사례에서 조현병 환자가 보이는 망상 장애나 환청, 환시, 이인증 등의 내용을 유발하는지 '도식 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체험과 임상이 풍부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야스나가 선생의 눈에 저 도식은 숲 속의 나무를 지탱하는 토양이지만 그러한 체험이 전무하거니와 '토양'을 알아볼 수 없는 나의 눈에 저 도식은 근시로 보는 숲이었던 것이다. 이걸 패턴으로 이해하기 위해 나는 야스나가 선생이 말하는 '현상학적 내성'을 자발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고(이건 융에게서 배운 걸 토대로 더 발달시켰지만 그 전부터 체험적으로 배워놓은 게 있는 '자세' 중 하나였다), 그로부터 a-a'를 이해하고, a'계의 '탄성률'이란 게 무엇인지, 그러니까 '팬텀 공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다시 '전체'로 보며 그것이 우리 정신 활동의 체험과 어떻게 대응되는지로 →부분으로 이해하니 비로소 저 밑에 두 원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도식으로만 봤을 때 저 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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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그냥 툭 던져진 것처럼 그저 '체험 공간'의 도식화일 뿐이다. 야스나가 선생은 이런 식이었다... ㅋㅋ.. 체험->도식이라면 분명 도식만 보고도 ->체험을 그려내겠지만, 체험 없이 ?->도식->으로 진행하면 '이해 불가=무의미'만 남을 뿐이다...


저 타원은 쉽게 말해 '고무공'과 같은 팬텀 공간의 '탄성체'가 적용된 체험 공간이다. 우리의 '체험'이란 것은, 일차적으로 a로 지시되는 어떤 '출발' 지점이 가정된다. 그 후 대상 b가 있는 세계를 b계라고 불렀을 때, 우리가 그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 그것은 '지각'이 되기도, '표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꿈도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일단 '인식'이라는 행위로 먼저 출력(입력)되므로(이것도 패턴이다...) 바로 그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간을 '팬텀 공간'이라 부른 후 a'계로 지시한 것이다. 즉, 우리의 인식이란 a-(a'-b)다. 여기서 우리가 팬텀 공간을 인식하지 못하는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a와 어긋났을 때 우리의 인식에 '착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야스나가 선생이 처음 팬텀 공간을 기술할 때 착각 운동 실험을 예시로 든 것이다.


여하간 분열증-조현병-통합실조증은 바로 저 팬텀 공간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기술되는 게 바로 '팬텀 공간론'이다. 팬텀 공간은 일종의 '탄성체'로써, 신축적이고 압축되었다면 다시 원상태로 복구되어야 마땅한데 조현병 사람들에게선 그 기능의 문제가 가정된다. 즉 위의 도식 3-5 하단에 있는 두 타원 L1, L2에서 L1이 바로 가설적 장애를 가리키는 분열증 환자의 의식이다. 본인은 이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L2의 '체험 공간'이 펼쳐져야 했으나 L1의 '체험 공간'이 의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L2-L1의 거리 만큼이 바로 '분열 d'로, 각 타원의 패턴(=체험 공간)이 겹쳐져 한 쪽 단이 역전되는 결과를 자아낸다. 따라서 말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단축(탄성률 저하)=패턴 역전=배후화가 도식으로는 매끄럽게 이어진다. 다만 도식만으로는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만약 그럴려면 모든 의문을 싹 지울 만큼 '하나하나(부분마다)' 전체와 어떤 → 인지를 인식하며 '이해의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이게 우리 인간이 '배우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그걸 몸으로 알고 있기에, 이런 글을 쓸 때도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조절을 잘 못했다(상대가 눈앞에 없기 때문이다=불특정 다수란... 익명이란...). 아마 야스나가 선생은 '눈높이 스킬'(그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임상의였다.. 나카이 선생도 그렇지만 인간학적 이해도가 뛰어난 정신의는 벌써부터 풍겨오는 아우라가 다르다)이 뛰어나 잘 조절해주셨지만 역시 그를 향한 비판자와의 토론 대담을 보니 세상 어딜가나 똑같구나 싶긴 했다. 무슨 말이냐면, '이해'는 결국 상대적인 것으로(패턴이기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서 단정짓는 인간과도 비판적 논의를 하는 면모를 볼 때 기초가 되는 이해, 그러니까 Wauchope가 말하는 '이해의 순간'이 있고 없고에 따라 같은 b(여기선 이론이자 텍스트겠지만...) 대상이 얼마나 자신의 A로 채색되는지다. 융의 토론 대담도 그렇고, 사실 학자들의 책을 읽으면 늘 실려 있는 그런 구도는 자칫 '철학의 병=논리의 병=합리의 병'에 빠지도록 자극하는 마력이 있긴 하다. 여튼,


매우 흥미롭고 대단한 책이었다. 내가 느끼기론 무척이나 독보적인 이론이라는 인상이다. 여태 이 '팬텀 공간'을 다루는 철학자는 본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 '질적 기하학'을 다루는 정신도 귀했다. 이런 요소들은 결국 나 같은 유형의 정신들에게 매우 높은 가치를 느끼게 하는 점도 주요했다. 이런 일반 독자 입장을 떠나 '현실'로 눈을 돌린다 해도, 오늘날 조현병을 진단받은 무수한 환우들의 일상과 그들을 보살피고 간호하는 이해 당사자들을 상상할 수 있다면 이 이론이 가진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겸허히 느낄 수밖에 없다. '이성'이란, '합리'란, 무엇보다 '이론'이란 인간의 고통을 완화시킬 때 비로소 제 면모를 드러내는 법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현장에서는 '자본론'의 오용과 남용과는 달리 걱정할 필요도 없을 만큼 무해하다. 하지만 패턴 사용자가 아니라면 이론의 무기화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정신은 차려야 한다. (갑자기 20대 중후반에 수유너머에서 겪은 한 강사의 후줄근한 인격이 외상으로 떠오른다... 에휴...)


나는 정신 전문의도 아니고 현장이나 임상 관계자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의 사적 삶에 '이해 당사자'로도 관계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조현병을 진단받은 무수한 환우들의 일상이 안녕하길 기원하는 '자기 자신'이 내 안에 있다. 이건 소위 투사도 아니요, 감정 전이도 아니다. 정체성 이슈도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마음으로, 야스나가 선생이 '원 투영-투사'라고 부른, 이건 아마도 빌헬름 보링거가 말한 '공감 충동', 우리 인간이 어째서 투사나 이입, 동일시, 공감을 할 수 있는지의 그 근원적 능력으로 인해서다. 이는 딱히 내용에 고정될 능력은 아니지만, 패턴이기도 하다. 조현병 환우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건 나의 근원적 능력의 필연적 결과지만 원인은 아니다. 우연일 뿐이다. 나의 체험이 우연일 뿐이다. (여기에 의미-무의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여튼 한국에도 이런 정신이나 이론이 소개되고 보다 간절하고도 절박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이 존중되고 존중받길 바란다. 부디 오류와 오만의 늪에 오래 머물지 않기를 바라며, Wauchope의 문구를 빌린다.


합리란, 합리적이지 않은 정신을 위해 봉사하는 능력이다

(Wauchope의 메시지를 내 언어로 변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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