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님 May 14. 2020

03 엄마 정말 다 쏟아도 돼?

  집주인이셨던 할아버지께서 이사를 먼저 하시고

살고 있던 빌라도 다른 주인에게 팔려서 일주일 정도의 공백이 생겼다.

 이사를 나가면 곧바로 다음 날 이사를 들어갔던 그동안의 집들보다는 시간이 좀 생겼지만 그렇다고 딱히 뭘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이사를 하기로 해서 그런지 여태껏 잘 살고 있었던 빌라가 답답하게 느껴지고 이사를 핑계 삼아 청소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쓸고 닦고 살았으니 며칠은 적당히 살아도 된다고 나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대신 일주일 동안 정말 부지런히 버렸다.

 달리 미니멀 라이프가 아니었다.

아파트나 빌라처럼 다용도실이나 베란다 붙박이장 같은 수납공간들이 없기 때문에

마당 창고에 보관할 수 있는 것과 다락 한편에 놓아둘 수 있는 것들로 분류해서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버렸다.

 그렇게 버렸는데도 이사 당일 창고와 다락으로 수많은 물건들이 들어가는 걸 보면서

블로그에 올라오는 깨끗한 집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건지, 분명히 다 버렸는데 저 물건들은 뉘 집 것인지,

나의 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정말 멀다고 느껴졌다.  

 아무튼, 주택에 살게 되면서 지금까지도 미니멀 라이프를 따라가고 있는 중인 건 분명하다.

 아니, 따라갈 수밖에 없는 중이라고 해야 맞겠다.


  남편은 거실 마룻바닥까지 교체하고 싶어 했지만 시간과 예산을 근거로 친환경 페인트와 황토 바닥 선에서 만족하는 것으로 협의를 마쳤다.

  아들이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남편이 알아보고 주문한 친환경 황토 페인트를 직접 칠했다.

처음 해보는 페인트칠이 낯설고 힘들었지만 오래된 벽지가 살구 색 빛의 옷을 입을수록 그 아늑함이 나의 마음에도 점점 채워지는 듯했다.

 남편이 알아본 황토 바닥은 적당량의 비율로 원재료와 물을 혼합한 뒤 바닥에 부으면서 뒷걸음질 쳐서 나온 후 말리기만 하면 되는 정이었는데 이것 역시 현실과 이상은 거리가 멀었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남편은 이사 전 마지막 주말을 밤을 꼬박 새워가며 황토 바닥과 함께 보냈고

 우리 집은 거실에만 마루가 깔려있고 방들은 장판이나 마루 없이 그야말로 황토색 황토 바닥을 갖게 되었다.

 황토 바닥이어서도 좋지만 남편의 노력이 담긴 정말 소중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도 우리 집 바닥을 좋아한다.


  드디어 이사 당일, 주택을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 아침, 저녁으로 찾아왔던 가을은 이제 감나무 잎들과 감에게 예쁜 옷을 선물해주고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살짝 춥긴 했지만 다행히 맑은 날이었다.

 미리 집안 치수를 재서 가구들 놓을 자리를 표시해놔서 그런지 이삿짐은 금세 자리를 잡았다.

 이삿짐이 오가는 정신없는 순간에도 남향집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마음이 부셨다.


  미리 설명은 해 두었지만 그랬더라도 어린이집 차에서 낯선 곳에 내려 어리둥절한 아들을 안고 집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이제 우리 집이야?"

 마당을 뛰어다니며 감나무 밑 흙을 밟으며 장독대에 올라가서 집 주변을 둘러보며 신나 하는 아들의 웃음에 또 한 번 마음이 부셨다.

 해가 질 때까지 마당에서 집 안으로 집 안에서 마당으로... 아들은 바빴고 즐거웠다.

남편과 나는 행복했고 감사했다.

  

  자잘한 짐들은 집주인의 손을 한 번 더 거쳐야 자기 자리를 찾기 마련이어서 주방 쪽 급한 도구들만 정리하고 있었다.

 금세 저녁이 찾아왔다. 순간 반짝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아들 방으로 가서 큰 블록들을 정리함 통째로 끌어왔다.

  "아들! 이 블록 마음껏 다 쏟아부어~ 여기는 그래도 돼!"

아들의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매일 아랫집 편찮으신 할머니와 예민해지신 할아버지 때문에 블록을 쏟기는커녕 하나씩 꺼내기도 어려웠었다.

  "엄마, 정말 다 쏟아도 돼?"

  "그래! 네가 원하면 다 쏟아서 가지고 놀 수 있어."

  "진짜? 할아버지 안 와?"

   은 말들 대신 아들을 살며시 안아주었다.

  "한 번 쏟아볼까?"

  "응~ 한 번 쏟아볼까?"

  와르르~~~~

 아들의 눈이 반짝였다.

쏟아진 블록에서 필요한 블록들을 찾아내며 저녁 내내 손도 이야기도 쉬지 않았다.

반짝이는 눈도 멋진 블록 작품들도 쉼 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사 첫날의 고단함을 뒤로하고 앞으로가 기대되는 하루가 저물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02 젊은 사람들이 왜 주택에서 살려고 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