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모든 것을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이혼 후 10년 #10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에 있었다. 남편과 아들이 곁에 있었고, 이내 의사를 불러왔다.
"임신 초기에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당분간 안정이 필요합니다."
또다시 임신이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본능적으로 출산 예정일을 계산했다.
아이를 낳을 즈음이면 내가 지금 준비 중인 공연도 무대에 올라야 할 때였다.
’ 지금하고 있던 일은 어떻게 하지? 공연 개막 때 현장 일은 누가 마무리하지?’ 수많은 걱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생각은 절대로 첫째 아들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둘째를 출산하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 후 1년까지 나를 지배했던 감정은 주로 원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30년 넘게 온갖 고생을 하며 달려왔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아기가 내 삶 전체를 바꿔놓고 있는 걸 견디기 어려웠다.
엄마라면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모성애’는 나에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될 여유가 전혀 없었던 나에게 임신은 육체적인 불편이었고, 출산은 인생 최대의 고통이었으며,
육아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것 같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 시간들로 인해 가정이 거의 파탄 날 지경까지 가보았기에, 다시는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새 생명이 나를 찾아온 기쁨을 오롯이 느껴보고 싶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사에 얘기해서 남은 임신기간과 육아휴직에 대한 배려를 구하는 것!
이번엔 제대로 태교도 하고 스트레스도 줄이기 위해 육아휴직을 내고 진심으로 출산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다. 대표님은 예상보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팀이 꾸려졌고, 내가 새로운 작품 준비를 핵심적으로 담당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그간의 가정사와 마음의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 아이는 저와 우리 가족이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일도 너무 중요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여유를 갖고 제대로 출산과 육아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지난 10년간 나를 지지해 준 대표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 선택을 존중할게. 대신 육아휴직 동안 네 업무를 맡을 사람을 빨리 뽑아서 신작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인수인계에 만전을 기해주길 바래"
대표님의 배려 속에 나는 대체근로자 채용을 시작했다. 그중 한 사람은 브로드웨이에서 짧지만 강렬한 경력을 쌓고 돌아온 실력자였다. 예전에 우리 작품의 기술 통역자로 함께 일한 적이 있어 누구보다 우리 업계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듯했다. 맡게 될 업무를 충실이 설명한 후에 그녀를 우리 회사에 합류시키기로 했다.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그동안 내가 해왔던 업무를 인수인계했다. 그녀가 남은 공연을 차질 없이 준비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렇게 나는 수개월간 가슴을 짓누르던 책임감을 비로소 내려놓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 아니면 안 돼!'라는 과도한 책임감으로 어떻게든 모든 걸 내 힘으로 끝내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더 이상 제작소에서 온갖 페인트 냄새와 먼지를 뒤집어쓰며 일하기엔 내 뱃속의 아이가 너무 소중했다. 오랜 시간 극장에서 종횡무진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과 부딪기며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내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