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너는 일하는 거 좋아하니까...
이혼 후 10년 #11
나에게 서서히 회사 일을 내려놓는 것은 여전히 낯선 일이었지만, 동시에 좋기도 했다. 그러나 아카데미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만큼은 중단할 수 없었다. 강의는 단순히 금전적 보상이나 화려한 경력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강의를 시작한 것은 공연 스태프로 일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난 후였다. 입사 후 지방공연을 따라다니며, 화장실 청소부터, 에어컨 수리, 스태프 챙기기 등, 잡다한 일들을 직함도 없이 하던 나에게 격려차 방문하신 대표님이 책 한 권을 내미셨다. 한눈에 봐도 어려운 무대 전문 서적을 짬짬이 번역하라고 하셨다. 열심히 1년 동안 번역을 겨우 끝내고 나니 이제는 책을 쓰자고 하셨다.
‘아는 것도 없는 나에게 책을 쓰라니...’
황당했지만, 쉽게 거절할 수 없던 나는 그간의 회사 자료와 나의 업무 내용, 많은 리서치를 통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3년 만에 내 이름이 들어간 책을 낼 수 있었다. 덕분에 짧은 경력이지만, 강의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업계의 선배로써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나누며 다양한 연령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 이혼소송과 육아로 지쳐가던 어느 날, 아버지가 개척교회 목사라고 밝힌 한 여학생의 권유로 처음 교회에 가게 되었다. 일단 교회에 아이를 데리고 가니 누군가 내 아이를 돌봐주었고, 나는 잠시나마 쉴 수 있었다. 심지어 주말에 근무가 있는 날에도 그 학생이 우리 집까지 와서 아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서울에서, 그 교회는 점차 내 지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그때는 나를 위로해 준 힘이 하나님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시간들로 인해 내 삶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종교는 2년에 한 번씩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장난 삼아 말하던 남편과 상의 끝에 교통이 편한 강남 근처로 이사했다. 더 이상 마을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고, 평지를 걸어 5분이면 2호선 지하철역에 갈 수 있었고, 내가 다니던 교회도 가까이에 있었다. 아들도 제법 오랫동안 입소 대기를 하긴 했지만, 동네에서 제일 믿을만하다는 24시간 구립 어린이집에도 입학하게 되었다.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던 어느 날, 남편은 건강검진 후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몸 어딘가에 용종이 생겼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어머니는 서울까지 한달음에 올라오셨다.
그는 해외 출장 중 과로로 세상을 떠난 동료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런 탓인지 작은 병명에도 심하게 낙심한 듯 보였다.
평소에도 자기 일에 큰 애정이 없어 보였던 남편은 밤새 TV를 켜놓고 잠이 들었다가, 출근 시간에 임박해 부스스 일어나 새 집을 지은 머리로 출근하기 일쑤였다.
그런 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부른 배를 감싸고 남편과 함께 지하철을 타러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나 오늘… 명예퇴직 신청할 거야. 너는 일하는 거 좋아하니까 계속 일하고, 나는 이제 좀 쉬어야겠어"
도저히 임신 7개월에 접어든 아내에게 출근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남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어려있었지만, 그 속엔 묘한 결의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의 한마디는 무더운 여름 아침, 답답한 공기를 헤치며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