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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보라 Nov 08. 2024

이혼 후 10년 #3

# 나는 그들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평온했던 겨울을 보내던 나에게 경악에 가득 찬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와 딸아이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내 아들 집을 드나들고 있냐?”며 호되게 꾸짖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 물건이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방치했다가는 큰일이 날 테니 결혼을 서두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만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았고, 결혼을 논할 단계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결혼 얘기에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떠오른 건 우리 아버지였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남자애들이 전화만 걸어도 통화를 엿듣곤 하셨다. 중학교 시절, 여름 수련회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다 큰 딸을 밖에서 자게 할 수 없다며 반대하셨다. 그랬던 아버지를 간신히 설득해 서울로 진학했건만, 이제 와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 것 같아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결국 나는 찜찜한 마음으로 결혼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양가 어머니들은 결혼 날짜를 잡기 위해 점집을 다니셨다. 궁합이 좋지 않다는 점괘가 나오자, 그의 어머니는 내키지 않아 했고, 우리 엄마는 부적까지 쓰셨다고 했다. 마치 내가 큰 결함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떠밀려가는 이 상황이 불쾌했다.


그는 항상 어머니의 뜻을 따르며 무심한 듯 의견을 전달했다. 내가 답답한 마음에 화를 내도 그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조언을 늘어놓았다. 결국 만난 지 8개월 남짓 지나던 4월, 우리는 양가 부모님의 성화에 밀려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전날까지도 나는 이 결혼이 옳은 선택인지 고민하며 많이 울었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데는 공연업계 선배들의 삶이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학을 졸업하고 예술단 배우로 첫 무대에 섰지만, 불규칙한 수입으로 생활이 어려웠다. 그러던 중, TV 프로그램에서 불우한 아이들을 초청해 유명 해외 뮤지컬 공연장을 투어 하는 장면을 보고 강한 전율을 느껴 무작정 영문 이력서를 들고 그곳을 찾아갔다. 우연히 만난 해외 스태프 덕분에 한국 공연 감독에게 이력서를 제출할 기회를 얻었고, 1년간의 인턴 생활을 거쳐 본격적으로 공연업계에 발을 들였다.


그곳에서 만난 선배들은 자유로운 사생활을 즐겼다. 40~50대가 되어도 결혼하지 않거나, 작품마다 애인이 바뀌거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더라도 이혼해 싱글로 지내는 이들이 많았다. 지방 투어나 야근, 주말 근무가 잦은 업계 특성상 안정된 가정을 꾸리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공연 속 화려한 조명과 음악을 마주할 때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 보였다.


나는 공연을 사랑했지만, 그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랜 기간 일하면서도 동종업계 사람들과는 연애하지 않겠다는 철칙을 지켜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의 큰 실수였다. 나와 취향이 맞고 내 직업을 이해해 주는 사람 대신, 부모님의 성화에 밀려 우연을 운명이라 착각하며 결혼을 선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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