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내가 꽤 마음에 들었다
이게 바로 30대가 되어가는 과정인 걸까? 어느 날 아침 내가 꽤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21년 12월 처음 정신과에 찾아간 이후 불안, 공황, 우울 삼 형제와 함께하는 일상을 보냈다.
밥 먹고, 자고, 싸고, 사람들을 만나는 일상 사이사이에 무너짐과 재건하기를 반복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다니, 눈부신 변화다.
어쩌다 이 지점에 도달한 건지 되짚어본다. 역시 퇴사가 만병통치약인가? 아니다. 선후관계가 틀렸다.
나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거인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곰곰이 더 생각해 보니 최근에는 트라우마와 공존하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나의 트라우마는 언제나 내 곁을 맴돌았지만, 나와의 관계성은 계속 변해왔다.
10대 시절은 트라우마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시기다. 그 와중에 트라우마는 세력을 더 키우고 있었는데, 주변과 나를 지속적으로 비교하면서 나에게 빠진 것이 무엇인가를 속속들이 따져보던 시기다. 알게 모르게 주변과의 관계와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20대 초중반에는 트라우마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 반응으로 트라우마 뒤에 숨거나 외면했는데,
숨는다고 함은, 스스로를 트라우마의 피해자로 생각하고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에 매몰되거나, 트라우마를 만든 상황과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느라 앞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으므로 숨었다고 표현했다. 이후에는 트라우마를 나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들을 따라 해보거나, 트라우마에 빠져있는 내 모습을 부정하거나 비난했다. 그럴수록 나의 트라우마는 더 자신을 봐달라고 난동을 피웠던 것 같다.
그리고 20대 후반이 된 현재. 나는 지금 트라우마와 같이 산다. (갑작스러운 동거 엔딩)
트라우마와의 공존은 ‘트라우마’와 ‘나’를 분리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전까지 나의 트라우마 이야기에는 단 한 명의 등장인물만 존재했다. 그런데 이제는 두 명이 된 것이다.
비유하자면 트라우마에 반응하는 나를 헐크, 트라우마와 상관없는 내가 브루스 배너 박사이다.
헐크는 트라우마에 의해 만들어지고, 브루스배너는 나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모습이다.
둘이 같은 몸을 공유하고 있지만 출신이 엄연히 다른 것이다.
헐크와 싸우지 않고 잘 지내거나, 헐크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면 다음 두 가지가 필수이다.
첫째, 언제 내가 헐크로 변하는지 깨닫고, 둘째. 내가 지금 헐크 상태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헐크로 변해도 다시 브루스배너 박사로 돌아올 수 있다.
결국, 트라우마를 뜯어보고 분해해서 알아내야 한다.
[TMI] 나의 정신과 치료 일대기 (2년 9개월의 시간)
- 2021.12 우울증 인지
- 2021.12 ~ 2022.02 항우울제 치료 / 2개월
- 2022.03 ~ 2022.09 단약 / 8개월
- 2022.10 몽골 귀국 비행기에서 인생 첫 공황발작
- 2022.10 ~ 2024.01 항불안제 치료 / 14개월
- 2024.02 ~ 2024.05 단약 / 4개월
- 2024.06 예기불안 재발
- 2024.06 ~ 2024.10 항불안제 치료 + 항우울제 추가 / 5개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