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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Sep 10. 2023

화이트 칼라의 색깔 노트

효구 단편선 제1권


1. 산세비에리아 스투키


가끔은 눈을 생각합니다. 파묻혀버리니까 조금은 낫더군요.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겨울이 깊습니다. 그 고독한 사람이 쓴 베레모를 떠올려 보십시오. 버건디 색의 모직 베레모. 그건 아늑한 눈동자를 가진 밤입니다. 바람 부는 들녘에는 외로운 밤을 함께 지새운 흰 눈이 덮였습니다. 함박눈이 가득 쌓인 들녘 위에 온 몸을 파묻는 것처럼 말입니다. 파묻혀버리니까 조금은 낫습니다. 이 데스크와 파티션 속에서 몸을 묻고 전화를 받고 자료를 만들고 출력을 하고 물론 가끔 몽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표정은 나쁘지 않습니다. 시선은 신경 쓰이지 않는걸요. 눈 속에 파묻힌 사람인걸요. 졸린 듯 늘 그렇게. 잠을 자듯이. 파묻혀서 전화를 받고 마우스를 돌리고 가위질을 하고 응대를 하고 외근을 나가고. 눈이 오면 좋겠습니다. 눈이 오는 나라로 떠나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파티션 위에 올려 두고 기르던 산세비에리아 스투키. 복합기 바로 옆자리는 매일 공기가 더워져서 숨을 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가을에 형이랑 남대문 시장에 가서 하나 골라보았습니다. 어때요? 이 푸른 색이 참 환하고 보기 좋지 않습니까? 앞으로 이 스투키의 죽음을 만날 겁니다. 서서히 죽어가는 스투키의 잎새를 차례차례 보여주려고 합니다. 모두가 예상할만한 아주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이 정직한 호흡을 따라 올 자신이 없다면 미리 예고해두겠는데 그림만 슥슥 훑어보고 여길 떠나도 됩니다. 이야기는 그게 전부이니까. 세상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은 생의 밧줄을 서서히 아래로 내려놓는 산세비에리아 스투키.



이것은 우필상의 기록이다. 필상은 늘 파티션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일을 한다. 필상의 파티션 안을 들여다보면 그의 책상은 하얀빛일 뿐이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여백미가 가득하다. 그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듀얼 모니터와 하얀 키보드, 하얀 마우스,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꺼내 놓은 서류들. 늘 서류가 문제다. 필상에게 그 하얀 종이 물체들은 변함없는 미스테리이다. 우주의 기원처럼 해답을 기대하기 힘든 언어들.


“안녕하세요. 필상 님, 김은철 변호사님의 따끈따끈한 전자 서면입니다.”


문서 수발을 담당하는 알바생의 낭랑한 목소리는 무표정한 그의 양쪽 콧구멍 안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메아리친다. 그래서 매일 다르지만 매일 적지 않은 양의 서류 속에 그의 커다란 코를 통째로 떨어뜨린 채 깜빡 잊고 집에 돌아가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이다. 우필상의 뒷자리에는 김은철 변호사의 작은 방이 있었는데 그는 우필상이 모시는 상사이다. 우필상은 대한민국 로펌 업계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남성 비서이다. 통상 로펌에서는 여성 비서를 뽑는다. 그러나 김은철 변호사는 파트너 승진 이후 인사 담당자에게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만큼 떳떳해졌다는 깊은 성찰을 하고 나서 이렇게 요청했다. 


“나는 표정이 없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우필상은 표정이 없는 청년이다. 그는 여섯시가 되면 검은 서류 가방을 캐비넷에서 꺼내고 서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가방 안에 자신의 군청색 파우치를 넣는다. 그의 파우치 안에는 민트색 써모스 텀블러와 백색 노트(우필상의 독백과 그림으로 가득하다)와 스테들러 펜슬, 하얀 돌멩이 하나가 들어있다. 돌멩이라, 사실 이 이야기는 돌멩이에 관한 추억이다. 



2. 말발굽


지난 해 여름 우필상은 1년 간 파견을 떠난 김은철을 따라가 바르셀로나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날은 1년 간의 외국 생활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으나 여전히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이었고 그는 미라마르 전망대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중이었으니 이런 날에는 그늘이 아닌 곳에도 바람이 조금 불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약속 시간은 저녁 8시 30분이었고 서쪽 하늘에 겹겹이 걸친 얇은 구름 사이로 차곡차곡 붉은 빛이 묻어나고 있었다. 팀벌리는 알 수 없는 단어를 외치면서 그의 길고 마른 다리를 크게 휘청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얼룩소의 울음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돌멩이를 하나 건네며 네르하 해변에서 주운 것이라고 했다.


“만져봐. 사실 이건 그냥 돌멩이는 아냐.”

“그냥 하얀 돌멩이 같은데?”

“이건 말발굽 같은 거야.”

“말발굽이라니.”

“공기 중을 부유하던 숨 한 줌이 바람이 되어 삶을 바꾸기도 하듯이 이 돌멩이로 너를 바꿀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 미미와 함께 몬주익 언덕에서 재회할 때 우연히 돌멩이를 줍게 될 거야. 그리고 이 말발굽을 떠올리겠지.”

“팀, 나는 미미와 헤어졌어.”

“Damn, You gotta be kiddin’ me.”


팀벌리는 잠시 악어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내쉬지 않았는데 그 광경은 어느새 15초를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우필상은 그가 질식하여 죽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우필상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등짝을 세게 내려쳤다. 팀벌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벌어진 입을 닫았다. 둘은 말없이 각자의 손깍지를 낀 채 빠르게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검고 푸른 밤하늘의 기세에 서서히 사라지는 붉은 빛들은 작은 구름의 꼬리로 연달아 줄그으며 서글픈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팀벌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말발굽 부드럽다.”

“미끌미끌하고 부드럽지.”





3. 바르셀로나 담배


김은철 변호사가 파견 나간 Sino & Associados가 위치한 빌딩의 아래에는 넓은 공원이 있었다. 파견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김은철은 안 그래도 촛불처럼 희미한 자신의 생의 의지가 담배 없이는 송두리째 사라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겼다. 공원의 그늘 아래에 서서 그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애증의 가루여, 나의 숨소리여, 숨을 담은 나무여.”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잠시 바라보았다. 그 때 그의 비서 우필상이 공원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김은철은 그의 비서의 무표정한 입술 모양을 알아채고 즐거움을 느끼며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던 담배 한 개비를 다른 손으로 집어 입에 물고 불을 피웠다. 


“변호사님, 한국에서 전화 왔습니다. 메일도 드리고 메시지도 드렸는데요.”

“미스터 우, 내가 메일을 읽었을까, 안 읽었을까?”

“당연히 읽으셨겠죠.”

“잘 아네.”

“당연히 메시지도 읽으셨겠죠. 1이 사라지지 않아도 메인 화면에 알림 올라오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님.”

“미스터 우도 하나 피워.”

“담배는 시작이 지옥입니다.”


우필상은 검은 정장 바지의 오른쪽 뒷주머니에서 자신의 전자 담배를 꺼냈다. 둘이 선 자리에 두 가닥의 하얀 연기들이 여러 줄기로 몸을 가르며 공중으로 솟았다. 연기는 공원 전체를 에워싼 오렌지 나무와 유향나무, 버드나무와 자카란다 틈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으나 식물은 쿨럭쿨럭 기침소리를 낼 수가 없다. 


“거처는 지낼만한가?”

“네, 몬주익 근처인데 주인 할머님도 좋으시고 지낼만합니다. 변호사님은 어떠십니까?”

“우리 딸이랑 애 엄마만 신났지. 여긴 물이 안 좋아. 그래도 자네는 피부가 좋은 거 같다. 부럽다. 나 여기 봐. 뽀드락지 났어.”


김은철은 자신의 코망울 정중앙을 가리켰다. 아주 작은 뾰루지가 나 있었다. 우필상은 두 손바닥을 피고 자신의 얼굴을 부비적부비적 만져보았다. 정말로 바르셀로나는 서울에 비해 물이 안 좋았다. 아리수처럼 매끌매끌하지 않고 물 속에 1 마이크로, 아니, 1 나노만큼이나 미세한 가루들이 자글자글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빛으로 가득한 눈밭,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정돈된 하얀색 책상 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우필상으로서는 달갑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가 머무는 집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본사 지원팀에서는 전문가에게는 헌신을 다해 거처를 구해주고 렌트비를 지불해 주었으나 비서에게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전문가는 전장의 최전방에 선 사나운 무사이고, 비서는 무사에게 무기를 가져다주는 우직한 일꾼이다. 각자의 삶의 방식에 대해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있다. 그것이 21세기식 지구촌 노동계급의 다정한 원리이다. 우필상의 경우 천성은 게으르지만 스스로를 성실한 노동자라고 여겼다.


그는 담당 변호사의 파견이 결정된 이후 줄곧 바르셀로나에서의 낭만적인 셋방살이를 상상하였다. 그리고 그 지독히 몽롱했던 그림은 현실이 되었다. 주인 할머니는 조금 특이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2층의 방 두 칸과 화장실을 전부 그에게 내주었고 아침, 저녁으로 훌륭한 식사거리를 1층 주방에 올려다 놓았다. 아침에는 크루와상과 자몽을 갈아 넣어 만든 요거트, 저녁에는 하몽이나 먹물 빠에야와 같이 소담스러운 가정식이었다. 주방 테이블에 정갈하게 놓인 돼지 뒷다리 말린 음식과 녹색 과일은 늘 한 쌍이었다. 집주인은 그 둘은 따로 먹어선 안 되며 모두 함께 한입에 쏙 넣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 쪼글쪼글한 작은 입술의 움직임은 우필상이 한국에 돌아가서 슬픈 일이 생길 때마다 두고두고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키가 우필상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조그마한 체구의 늙은 여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해지도록 귀여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하몽 한 점이 멜론도 없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쓸쓸함을 참을 수가 없어.”


집주인의 옷차림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부친 우필상의 간소하기 짝이 없는 이삿짐이 도착하던 날은 그가 그 집에서 지내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는 매주 월요일 집주인이 검정색 도트무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요일에는 푸른 스트라이프 민소매 티셔츠와 하얀 반바지를 입었다. 수요일에는 하얀색 도트무늬에 검은 바탕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었고, 목요일에는 하얀 민소매 티셔츠에 푸른 스트라이프 반바지를 입었다. 나선형 계단 옆 벽에는 스트라이프나 도트 무늬의 추상화를 담은 액자가 번갈아가며 걸려 있었다. 우필상은 그 아름다운 규칙성과 정갈함에 감탄하였고 그가 한국에서 꿈꾸던 것들이 현실이 되었음에 조금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코끝이 찡해졌으나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우필상은 감성이 메마른 사람은 아니다. 


3층에 사는 팀벌리는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추상화를 전공하는 아주 마르고 키가 큰 청년이었다. 우필상은 자신이 게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엉덩이에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늘 낡은 청바지 또는 츄리닝 바지를 입고 주방 위 가장 높은 선반에서 그릇을 꺼내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팬티가 다 드러나는 그의 뒤태를 보며 우필상은 사진으로 찍어 남겨두었다가 방에 들어가 몰래 보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끝끝내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휴대폰의 용량이 모자란 탓이었다. 팀벌리는 그의 오랜 여자친구의 남동생과 그 친구들에게 크로키를 가르치면서 받은 돈으로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정말 더럽게 못 그려.”


팀벌리는 우필상의 백색 노트를 본 적이 있다. 


“너보다는 걔네가 조금 낫긴 하지만.”


팀벌리는 마지막 학기를 끝내면 여자친구와 함께 남부로 바캉스를 떠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늘 학업과 생계를 병행하느라 시간에 쫓기고 있었으므로 이런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And I move slow and steady. But I feel like a waterfall.”



4. 우연히 만난 미미


“그런데 누구 전화였나?”

“노동팀 박변호사님인 것 같습니다.”

김은철은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었다. 


“개자식.”

“개쌍놈새끼.”

“호랑말코같은 새끼.”


김은철은 우필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필상도 노동팀 박동우 변호사를 정말 싫어했다. 김은철도 마찬가지였다. 


“자리로 돌아가서 박동우랑 통화하고 나면 지난달부터 이쪽 사람들이랑 해오던 사건은 모조리 바르셀로나 석회수 말아먹는 겪이 될 수도 있어. 사건의 본질은 이거야. 생(生)은 기적인가, 노동인가? 노동은 자본의 부속품인가, 생(生)의 의지인가? 결정된 건 아니지만 벌써부터 맘 상하니까 오늘은 한잔 하자. 저녁에 25층 바에 예약해 둬. 예전부터 거기 가보고 싶었어.”


그 날 밤 현지 법인 변호사 한 명과 김은철, 우필상은 빌딩 25층에 있는 바에서 와인을 마셨다. 우필상은 그때 미미를 처음 만났다. 


“올라, 마마시타.”


미미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번갈아가며 세 번 윙크했다. 그리고 두 명의 변호사들과 숨 쉴 새도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언어’에 굶주린 짐승들 같았다. 두 명의 변호사는 미미의 필요 이상의 가벼움에 즐거워했다. 미미는 양손으로 두 변호사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추면서 노래하듯 종알거렸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을 연극배우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미는 휘발유처럼 가벼웠다. 휘발유는 자칫 폭발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액체이다.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과묵한 우필상의 경우 조용히 경청하는 편이었다. 우필상은 그녀가 조만간 날아가 버리지는 않을지 염려했을 뿐이다. 그녀의 말들은 증류수[1] 같았다. 요지는 이러했다. 재미교포인 미미의 한국 이름은 ‘민미희’이며 바르셀로나에 온지 1년이 되었고 미국에서 걸스힙합을 전공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미미은 삭힌 홍어에 묵은지를 올려 먹는 것이 그립다. 우필상은 미미의 튀어나올 듯 커다란 왼쪽 눈과 딱 달라붙은 분홍색 크롭탑 티셔츠와 배꼽에 달린 은색 배찌를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우필상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술에 취해 흐리멍덩했고 걸음은 제멋대로였으나 컨트롤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미미의 헝클어진 노랑 머리카락을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우필상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1층 주방 옆에 있는 거실 카우치에 비스듬히 누웠다. 잠시 거실 옆에 놓인 찬장(온통 하얀색 찻잔과 주전자뿐이다)을 바라보다가 그는 멍한 표정으로 찬장과 자신 사이의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줌 인과 줌 아웃을 반복하곤 한다. 그리고 자신의 군청색 파우치에서 주섬주섬 노트를 꺼내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뭐해?”


찻물을 끓이러 내려 온 팀벌리는 사마귀의 팔다리처럼 기다란 상체를 좌우로 리듬있게 흔들며 우필상의 옆 자리에 털석 앉았다. 우필상은 그의 걸음걸이와 좌우로 흔드는 몸짓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았다면 이 낡은 소파가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지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으로 기분이 심란해진 나머지 왼쪽 다리를 달달 떨었겠지만(우필상은 불안하면 다리를 떤다) 그 순간 우필상은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먼저 그는 팀벌리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는 오른쪽 입가의 미세한 경련만큼이나 부자연스러워 보이게도 팀벌리를 향해 천천히 어깨동무를 시도했다. 만약 집주인 할머니가 깨어나 이 광경을 보고 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의 보라색 민무늬 스카프로 눈물을 훔치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Poor, boy!(딱해라!)’


팀벌리는 우필상의 어깨동무를 쫙 핀 두 손바닥으로 막아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도 그의 옆에 딱 붙어 앉아서 백색 노트에 적힌 글들을 읽어내려고 했다. 


“이 말들은 하나도 모르겠고 이 여자는 누구야?”

“민미희.”

“미미니?”

“엉, 민미희.”

“미미니가 누군데?”


팀벌리는 우필상이 찬장을 향해 줌인-줌아웃하는 모습을 약 5초 정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우필상의 안쓰러운 어깨동무 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오른쪽 팔로 그 어깨를 감싸 안은 뒤 왼쪽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You’ve got a crush”

                 

[1] 증류수는 수돗물이나 우물물을 가열하여 수증기를 발생시키고 만들어진 수증기를 냉각시켜 얻을 수 있다. 




우필상이 숙취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토요일 아침 내내 팀벌리는 그의 방까지 찾아와 수선스럽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신음하던 필상은 변기 앞에 엎드려 토사물을 뱉어내거나 연달아 헛구역질하거나 다시 침대 위로 기어가서 신음하기를 반복하였으나 팀벌리는 아랑곳없이 ‘토요일 아침의 팀벌리 만담회’를 이어나갔다.


“우선 그 애를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해야해. 데칼코마니처럼 옆으로 딱 접으면 겹쳐버리는 연결 고리. 필연을 우연처럼 꾸미는 것은 아주 중요해. 왜냐하면 너는 그 애의 눈과 배꼽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봐야하거든. 나는 너의 눈을 원한다. 너의 배꼽이 맘에 든다. 이렇게. 날 바라봐. 연습해봐.”

“싫어 팀벌리 나는 오늘 몸이 아파.”

“숙취에는 호박 복숭아와 체다 치즈를 함께 먹는 것이 최고인데.”

“숙취에는 청양고추를 넣고 끓인 맑은 콩나물국이 최고야.”

“콩나물국이 뭐야? 콩나물이라는 것을 끓여 만드는 수프야?”

“그래. 호박 복숭아건 치즈건 콩나물을 끓인 수프건 지금 당장 나에게 가져다주지 않을 거라면 그만 어지럽히고 이 방에서 꺼져줄래?”


팀벌리는 물론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자신의 독백을 이어갔다. 


“도대체 미미의 짝짝이 눈은 어떻게 생겼기에 네가 한눈에 반해버렸을까. 나도 한번 보고싶다. 가만, 우필상! 너의 눈이 짝눈이구나.”


팀벌리는 운동화로 바닥을 쿵쿵거리며 필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속에서 뱉어낼 것이 없을 정도로 헛구역질 하느라 온 몸의 기운을 소진한 우필상은 팀벌리의 섬세한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팀벌리는 필상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두고 그의 숱 많은 눈썹을 검지손가락으로 느리게 간질이기 시작했다. 필상은 머리뼈로 팀벌리의 무릎뼈를 느꼈다. 


일요일 오후 시간이 되어서야 몸을 회복한 우필상은 침대에 누워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다짐했다. 다시는 변호사와 술을 먹지 않으리라. 다시는 남자에게 어깨동무를 시도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썹이 간질간질한 기분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일요일 오후의 우필상 다짐회’를 마친 우필상은 또 다시 한 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지저분해진 마음을 정돈시키며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그의 집주인이 고추분말을 넣고 어설프게 끓여준 콩수프의 그릇과 그 꾸덕꾸덕한 찌꺼기가 묻은 수저를 설거지를 할 때, 몇 벌 되지 않는 빨래(온통 하얀색 팬티과 메리야스뿐이다)를 세탁기에 집어넣을 때, 그 빨래가 다 되기까지의 40분의 시간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미미의 헝클어진 노랑 머리카락의 잔상이 바람개비처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멍해진 얼굴로 빨래들을 건조기에 넣다가 그는 모르고 그의 하얀 메리야스 셔츠 한 장을 누락시키고 말았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의자 위에 널어 둔 덜 마른 하얀 메리야스 셔츠를 바라다보면서 그는 미미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필상은 화요일 퇴근 무렵까지도 미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굳이 그녀를 찾아가서 수작을 부리는 것은 그의 일생 부끄러운 역사가 될 것이므로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수동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에 관해서라면 운명론자였다. 그는 하얀 대리석으로 끝없이 이어진 건물의 벽면을 왼쪽 검지 손가락으로 스치면서 걸었다. 인연이라면 만나리라. 그는 그의 검은 서류 가방을 손아귀에 더욱 꽉 쥐면서 중얼거렸다. 마치 기도하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Amor Fati. Amor Fati. Amor Fati. Amor”

“어머, 안녕하세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미미요!”


미미는 자칫 경박해 보일 수 있는 웃음소리를 교양 있게 매듭짓는데 탁월한 사람 같아 보였다. 우필상은 표정이 없는 사람이므로 미미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에도 가볍게 목례했을 뿐이었다. 미미는 우필상을 보고 방방 뛰었는데 그 점프력에 그는 조금 놀랐다. 그러나 그 순간 미미의 점핑보다 중요한 것은 우필상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필상은 자신의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조만간 제주 엉또 폭포의 데시벨만큼이나 상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미미가 맥주 한 잔을 제안했을 때 재빨리 인근에서 가장 소란스러워 보이는 펍으로 들어갔다. 


“제가 그날 조금 취해서 잘 기억이 안 나기는 하는데 지난번에 어머님 얘기를 하다 말았던 것 같습니다. 지방 출신이시라고 했지요?”

“미시시피에요.”

“미시시피? 섬진강이 아니고?”

“네, 맞아요. 뉴올리언스 미시시피 강변 근처에서 태어나셨고 나중에 목포로 이민 오셨어요.”


우필상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 자신도 그 말의 신빙성 부족을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우필상은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짓고 싶었고 일부러 눈을 더 게슴츠레하게 뜨면서 미간 주름을 만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는 비로소 우필상에게서 어떤 종류의 표정이 한 줄기 연기처럼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마음이 놓였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들을 시작하였다. 


“지난번에는 새로운 안무를 만들었어요. 보세요.”


미미가 테이블 옆에 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필상은 당황한 나머지 양쪽 볼이 푸르게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화하는 내내 누가 볼까 부끄러워 도망쳐 버리고 싶었던 마음을 감추려 애써오던 시간이 무색해지게도 필상은 다급한 손으로 어정쩡하게 직립한 채 미미의 작은 어깨를 붙들고 제지했다. 


“아.” 


짧은 순간이었지만 필상은 그녀의 얼굴에서 아주 처량한 기색이 묻었다가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필상 씨는 춤을 추지 않나요?”


우필상도 춤을 추곤 한다. 평소의 우필상이라면 밝히지 않았겠지만 또 다시 미미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끼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나 곰곰이 떠올려 볼수록 그는 꽤나 자주 춤을 추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불을 끄고 춤을 춘 적이 있기는 합니다. 커튼 다 내리고요. 퇴근 후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왜 불을 끄고 춤을 춰요?”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공터에서 미미는 필상에게 신호를 보내면 바로 음악[1]을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평일 저녁의 공터는 고요했다. 가로등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빛은 멀리서 엎질러진 물의 가장자리 부분처럼 겨우 닿았다. 그보다 달빛이 공터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달빛은 가로등의 불빛과 달랐다. 필상은 달이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기분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필상의 입술부터 이마까지 푸른 밤의 빛의 닿았다. 그는 그것이 달의 노래 소리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필상은 미미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멀리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간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이 끝나기도 전에 미미는 필상이 있던 벤치 옆에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이 안무가 맘에 들지 않아요?”


필상은 미미에게 키스했다. 하얀 달빛은 공기를 투사하며 푸른 증기를 가득 뿜었다. 온통 밀도 높은 푸른빛이었고 평일 저녁의 공터는 고요하기 짝이 없다.

                 

[1] Billie Eilish, 「&burn」.





5. 남영동 파리 

















귀국 후 한 달이 지났을 때, 파리 한 마리가 남영동 작은 방 안에 들어왔다. 필상은 자신의 방 안에 친구조차 잘 들이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가 저녁 식사를 하던 와중에 침입한 불청객에게 짜증이 나서 신음소리를 내었다.


“레헤엥엥” 


파리는 알아들은 모양으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필상은 화장실 문을 굳게 닫았다. 우필상이 직접 만든 엔초비 라쟈냐를 남김없이 다 먹고 이를 닦기 위해 화장실 안에 들어갔을 때 파리는 형광등에 찰싹 붙어있었다. 파리는 화장실 형광등에 매달려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파리는 불빛에 매료되었다. 불빛은 파리의 수천 개의 눈 속으로 무한히 흡수되는 모양이었다. 파리는 현혹되고 현혹되었다. 우필상은 그가 두 발을 쉴 새 없이 비비는 모습을 발견하고 치약의 거품을 튀기며 또 신음소리를 내었다.


“에우우우룸”


우필상은 파리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파리는 우필상이 질색을 하거나 말거나 늦은 밤 석탑을 도는 고려시대 아낙네처럼 비나이다를 반복했다. 파리는 그 인공의 빛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그와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용광로라도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은 기세로 형광등을 기어 다녔다. 우필상은 거글거글 입을 헹구어 내자마자 도망치듯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 아침 우필상이 오줌을 누려고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파리는 변기통 안에 떨어져 죽어있었다. 그는 그 위로 누런 오줌을 쌌다. 



6. 색깔 노트


하얗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색깔에도 숨이 붙어 죽어버리기도 하는군요. 파리도 죽고 스투키도 죽고. 그래도 달빛 환한 밤이면 나는 가끔 삭힌 홍어에 묵은지를 올려 먹으면서 와인의 붉은 색을 생각합니다. 붉은색만큼 사소하고도 즐거운 것이 있을까요. 이번 주말에는 눈이 내린 들녘에 가보려고 합니다. 거기에 나의 하얀 돌멩이를 두고 올 것입니다. 하얀 눈밭의 하얀 돌멩이는 어떤 인연이 있습니까.




이것은 우필상의 불연속적인 기억이다. 필상은 늘 파티션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일을 한다. 필상의 파티션 안을 들여다보면 그의 책상은 하얀빛일 뿐이다. 그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늘 서류가 문제다. 우주의 기원처럼 해답을 기대하기 힘든 언어들.


“안녕하세요. 필상 님, 대량 복사기로 출력하신 김동우 변호사님의 따끈따끈한 강연 자료 가져다드립니다”


                           <<노동사건의 유형 및 특징>>


                           박동우 파트너 변호사 / 김은철 파트너 변호사

 

                           CONTENTS

                           제1장 노동자문사건

                           제2장 노동쟁송사건


                           TIPS 노동쟁송 대응전략


                           1) 노동쟁송은 증거싸움이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2) 누가 더 나쁜 놈인지 프레임을 만들어라

                           3) 초반에 기선을 제압하라

                           


                                                                                              PARK & CHANG



문서 수발을 담당하는 알바생의 낭랑한 목소리는 무표정한 그의 양쪽 콧구멍 안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텅텅 울린다. 우필상은 대한민국 로펌 업계에서 단 하나의 남성 비서이다. 보통 로펌에서는 여성 비서를 뽑는다. 우필상은 표정이 없는 청년이다. 그는 눈과 코와 입이 없는 사람처럼 투명한 얼굴을 하고 복도를 걸어간다. 그의 검은 구두가 내는 소리는 카페트가 다 잡아먹는다. 카페트는 자기 위를 걷는 사람에게 관대하기 짝이 없다. 


법무관 출신 신입 변호사들을 위한 교육장의 문을 열자 시선이 우필상에게 쏠린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표정이 없는 사람을 알아본다. ‘투명인간이다!’ 투명인간은 자신의 소임을 마치면 사라진다. 그 이상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노동송사 전문 변호사라는 풍채 좋은 사내는 한쪽 입이 비뚤어졌다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바와 같이 대머리는 아니었다. 법무관 출신 신입변호사들이 자리에 앉아 저들끼리의 우스갯소리로 즐거워하던 그 시점에 그는 강연장의 문을 가볍게 열고 가볍게 뛰며 등장했다. 그 가벼움 덕분에 법무관 출신 신입 변호사들의 웃음은 한 순간에 마법처럼 증발했다. 그는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가 강연대 앞에 서자 기다란 유선 마이크는 그의 가슴팍에 밖에 안 닿았다. 그는 유선 마이크를 길게 죽 늘이고 목 스트레칭을 했다. 그는 아주 유연한 사람처럼 어깨 죽지를 돌리며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가만히 허공을 내다보았다. 마치 검은 지평선을 바라보는 낚시꾼처럼. 


“진짜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줄까?”

그는 칠판에 촛불을 하나 그렸다. 





“적당히 불행해지면 된다. 아주 밝은 촛불을 경계하라.”

그는 칠판에 적었다. 아주 밝은 촛불을 경계하라!


“꺼져가는 촛불에 희망을 불어넣고 왼쪽 손에는 늘 기름이 가득한 라이트를 준비하라. 마음의 틀 안에 어둠의 우물을 집어넣어라. 그것은 머지않아 빛의 거울이 된다. 거울은 늘 세상의 반대편에 있다. 그것을 영원이라 믿기를!”


신입 법무관 출신 변호사들은 강연대 앞에 선 사내의 비뚤어진 입을 바라보았다.


끝 (8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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