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르친다는 것은 교사의 정체성(identity)과 진실성(integrity)에서 나온다.”
- 파크 파머
1995년 정부가 수요자 중심 교육개혁을 표방하고, 2000년대 후반 학교 자율화 개혁이 이루어졌다. 신자유주의적 교육 환경 가운데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는 ‘서비스’로 비유되었고, ‘수요자 중심의 교육’에 따라 학생, 학부모,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학교는 애쓰게 되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아파서 약 챙겨갔는데, 약 먹는 것 챙기셨나요?”
“담임 선생님 다른 분으로 바꿔주세요. 우리 애랑 안 맞아요.”
“애들이 싸울 때, 선생님은 뭐 하셨어요? 이러니까 학교 폭력이 일어나죠.”
학부모들의 과다한 요구와 불만, 책임추궁뿐만 아니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학생은 갈수록 늘어나고, 아무런 법적, 제도적 안전장치 없이 임해야 하는 생활지도 등으로 교사는 심리적으로 위축되며 소진된다. 고도의 감정노동이 일상화된 현실 가운데, 교사는 교직에 대한 회의를 품기도 하고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한다.
‘나는 교사인가?’
늘 고민하던 문제였다.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교사’로 살아간다. 그 가운데 ‘인간’인 나는 사라지고 ‘교사’로서 해야 하는 무수한 책임이 옥죄여온다. 교육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며 거리에 나가 함께 외쳤지만, 학교에 돌아온 것은 주먹구구식의 해결책과, 더 과중해진 업무였다. 문제상황은 그대로인 가운데, ‘교사의 전문성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각종 수업대회, 수업동아리, 공개수업 유인책 등이 쏟아진다. 현장의 아픔이나 고통에는 무심한 듯이, 위에서 내려오는 지침이나 전달사항에 숨이 막힌다. 교육에서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소외된 기분이다.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안심하고 교육할 수 있는 환경이다.
교육 현장에 대한 회의감이 커질수록, 이 불안정하고 때로는 위험천만해 보이는 학교 현장 속에서 어떻게 꿋꿋이 내 존엄을 지키며 교사로 살아갈 수 있을지 한 인간으로서 교직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내게 더욱 필요했다.
‘교사로서 너는 누구니?’
다양한 외적 요구와 내면의 좌절 속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내가 교사로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을 묻는다. 나는 교사이기 전에 존귀한 한 인간이다. 나의 능력, 소유와 관계없이 귀한 존재이다. 비록 사회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고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럼 교사로서 나는 누구인가? 교사로서 나는 학생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삶을 단단하고 아름답게 가꾸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자이다.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는가?’란 질문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교사로서 어떤 삶을 원하는지 계속 일깨우며, 목적의식이 흐려지지 않도록 존재로서 꿋꿋이 살아가고 싶다.
교사로서 학생들이 사회에서 온전히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수업 속에 있다. 교사로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다 보니 ‘수업’이야말로 교사로서 살아가는 중요한 의미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좋은 수업을 위해 고민하고 준비할 여유를 주는 않는 팍팍한 현실 속에서 그래도 수업은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이다.
파커 파머는 가르치는 행위가 좋든 나쁘든 인간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실존적 존재로서, 한 교사로서, 교육과 수업의 의미를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나의 내면을 돌보고, 나만의 고유한 존재적 욕구를 살핀다. 다시 교실로 들어서면서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 학생들과 연결되고 소통해야 할 ‘나의 수업’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교사는 수업을 잘해야 된다’는 교육부, 교육청의 제도적 압박 때문이 아니다.‘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며 모든 교육의 책임을 교사에게 떠미는 사회문화적 요구로 인함도 아니다. 내 삶이 보람되고 학생들의 삶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어린 시절, 공부하는 게 좋고 지식을 누군가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교사가 되고자 했던 그때의 마음을 되새긴다.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돕는 일이기에 오늘도 힘을 내어 수업을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교사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은 한계가 있다. 나 또한 내면을 계속 돌보며 교사의 삶에 의미를 찾고 성찰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광야 같은 학교에서 생존조차도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수업 속에서 고군분투하지만, 수업은 여러 방해 요소로 인해 혼돈의 장이 되기도 한다.
교실이라는 고립된 공간 속에서 누군가 나처럼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아무리 애써도 변화되지 않는 교실을 보며 무기력감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수업 후, 끊임없는 자책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교직에 회의를 느끼며 방황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소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생과 사를 오가며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교 현장의 여러 문제를 이겨나가고, 수업 속 고민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우리는 더 솔직해지고 진실해질 필요가 있다. 나 혼자만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실은 ‘다른 선생님들도 나같이 고민하며 힘들어하고 있었구나.’하는 순간이 있지 않았는가? 우리가 걸어온 교직의 길, 희로애락이 가득한 길, 때로는 힘겨운 길이었지만 그 가운데 써 내려온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문제상황을 뛰어넘는 선물 같은 통찰력을 얻기도 한다.
작년 광주수업코칭연구소 선생님들과 했던 연구모임을 떠올린다. 더 나은 수업을 고민하며 줌(ZOOM)에서 한 달에 두 번 정도씩 만나며 자신의 실행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회성 수업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수업 실행 과정을 나누는 것도 의미 있었다. 선생님의 고민과 해결 과정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업 고민과 실천과정을 나누었더니 문제에만 매몰되지 않고, 조금씩 해결책을 깨닫고 실천하며 함께 성장해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연구 친구의 따뜻한 격려의 말, 깊이 생각하게 하는 성찰적 질문, 실천을 기록해 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배움의 시간이었다. 문제는 늘 있지만, 동료와 연결될 때 생산적 에너지가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
나 홀로 어려움을 짊어지지 말고, 함께 연결되어 살아가면 좋겠다. 우리는 교사이기 전에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고유한 존재이며, 제각기 자신의 교육적 신념,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순적 환경, 내 맘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계속 이 길을 걸어가기 위해 우리는 연대한다. 집단 지성을 모아 학교 현장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탐색하며 나아가려고 한다. 학교에서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료, 혹은 학교 밖에서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선생님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 홀로 외롭지 않게 동료 선생님들과 이 길을 함께 걸어가면 좋겠다. 내가 누구인지, 왜 교사로 살아가는지, 수업은 어떠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동료와 진솔하게 소통하며 연결되는 가운데, 내면의 나침반은 내가 가야 할 방향을 더 또렷이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