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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표현

by 햇살샘

착한 교사의 고뇌

교원 특별 연수 과정인데, 해야 할 일은 점점 늘어간다. 따로 일을 벌인 것 같지 않은데도 업무가 쌓여간다. “선생님은 일을 달고 다니나 봐요.” 그렇다. 일이 자꾸만 날 따라 다닌다. 이는 거절하지 못하는 나의 유약함 때문일 것이다. 어느 누구와도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은, 미움받고 싶지 않은 비합리적인 신념은 여러 업무를 끊어내지 못했다. 결국, 쉬고자 쓴 특별 연수 기간, ‘일의 경계’를 짓지 못한 채 지쳐간다.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과 집안일 역할분담을 명확하게 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더 여유 있는 내가 허드렛일을 주도적으로 할 때가 많다. 친청 엄마가 고향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엄마 생신을 홀로 보내시게 할 수가 없어서, 차를 몰고 먼 거리에 있는 친정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친정을 다녀온 직후 너무 무리했는지 몸에 탈이 났다. 가족을 챙기다 보니 정작 자기돌봄에는 소홀했고, 많이 아팠다. 결국, 원망은 괜스레 소중한 가족을 향했다.

왜 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주도권을 타인에게 양도한 채, 이렇게 살아가는가? 그 누구도 나에게 요구하지 않았지만, 난 거절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이타적인 삶의 사이클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착함’이 좋다고들 하지만, 나는 ‘착하다’는 말이 싫다. 그 착한 성격이 결국 나를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있어도 용기 있게 말도 못하고, 지나친 배려로 에너지를 소진하고, 자기희생적 행동으로 날 소외시킨다.


입이 있는데 왜 말을 못 해?

입이 있지만 말을 못한다. 꾹꾹 가슴 깊숙이 눌러 담는다. 화가 나는 감정이 올라와도, 화를 느끼는 내가 잘못된 것만 같아 표현하지 못한 채, 감정을 얼른 전환시킨다. 억울한 감정이 들어도, 억울함을 표현 못 하고 마음속에 쌓아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공격성이 자극될 때에도, 이를 외부로 표현하지 못하고 나를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그 결과, 내가 나를 지치게 만들어 버렸다.

최근 몇 년간 학교에서, 센터에서 근무하면서 나와 다른 성격의 사람들을 관찰해 왔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의 생각과 욕구를 솔직히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주장을 논리적으로 피력하며, 필요할 때에는 공격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부럽다. ‘예의 없는 행동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다가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시원시원하니 좋아 보인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공격성과 자기 보호본능을 발휘했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를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나는 표현에 서툴까?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까봐? 그것도 있지만, 내가 미움받을까 봐 겁이 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기에, 존재가 부정당하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착한 사람 연기를 한다. 하고 싶은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끙끙 앓는다.


사회적 생존에 필요한 힘

지난 5월 말, 제주도에서 악성민원으로 한 교사가 생을 마감했다. 2023년 서이초 사건 이후, 교육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또 교권침해문제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교육 현장은 어려운데, 나는 어떻게 존엄을 지키며,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건강해야, 교사로 계속 버틸 수 있을텐데, 내 지금 성격으로는 오래 가기가 힘들 것 같다. 계속 스트레스를 속으로 삭이는데, 어떻게 오랫동안 버티겠는가?

‘서이초 선생님도, 제주도 선생님도, 좀 더 공격적으로 학부모에게 대응했으면 어땠을까? 맞서 싸웠으면 어땠을까? 교직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사회체제에 순응적인 나 또한 피해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착하고 책임감 강한 교사들이 위협당하기 쉬운 사회와 학교 구조에 분노한다. 사회는 문제가 생기면 교사 개인에게 책임을 물으니까. 그럼 착한 교사들은 자신을 자책하며 고통에 늪에 빠지기 쉬운 것 같다.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수업을 아무리 잘 하고 싶어도, 생존이 위협받으면 수업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활지도, 학급경영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목숨을 걸고 권위를 지켜야 해.”

예전에 선배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말이 귀에 쟁쟁하다. 어쩌면 교실에서도, 교사는 공격성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교사가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교실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학생들이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공격성이 0에 가까운 나는 어떻게 공격성을 키울 수 있을까? 건강한 경계 또한 힘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내게 힘이 없을 때에는, 내 경계를 지킬 수 없고, 무너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안돼’라고 용기내어 표현하는 연습, 올해 나의 과제이다.

개인의 힘 뿐만 아니라, 교사 집단의 힘 또한 중요하다. 교사가 학생들을 마땅히 지도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법의 힘, 민원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의 힘, 학생들을 훈계하고 생활지도 할 수 있는 규율의 힘, 사회에 교육 현장의 필요를 호소할 수 있는 표현의 힘이 필요하다. 교사가 말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 여러 사회적, 교육적 문제가 곪아있게 된다. 행동이 필요하다. 나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기 표현의 시작

그나마 내게 숨통을 틔여주는 수단은 글이다. 말로는 수많은 생각으로 인해 내뱉지 못한 말을 글로는 정제해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만 소통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필요할 때에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입도 있고, 성대도 있는데 왜 말을 못하는가?

학창시절에도 그랬다. 불합리하게 날 공격했던 반 친구들을 향해, 난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때에도 억울했다. 지금도 난 많은 울분을 갖고 살고 있다. 기독교인의 덕목은 ‘인내’이지만, 참고 참고 참다가 병이 날 것 같다. 더 이상은, 참지 말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지 않으실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건강한 공격성은 ‘NO’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다시금 내게 몰린 수많은 일들을 하나씩 가지치기를 하고 싶다.

‘시험관 시술을 해야지.’

‘아니에요. 전 이미 충분히 했어요. 더 이상 몸이 망가지기 싫어요.’

‘모임에 참석해야지.’

‘아니에요. 저에게는 쉼이 더 필요한 시기에요.’

‘아니에요’라는 말을 하니, 속이 조금 트인다. 그래, 나도 ‘NO’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해 보지 않은 것이다.

사실 내 마음 속에는 ‘약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은연 중에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약하고 착해보여야만, 다른 사람의 요구나 부탁을 들어줘야만, 사람들이 날 경계하지 않고 보호하고 아껴줄 것 같다는 생존 전략도 있었을 것이다. ‘내게는 힘이 없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싸워본 적도 거의 없고, 싸우면 질 것 같아서 갈등을 최대한 회피해 왔다. 이러한 전략들이 나름 효과도 있어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무의식적으로 이 전략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방식이 주는 부작용이 크기에, 이제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조금씩 ‘NO’를 연습하며 더 건강해지고 싶다. 내게도 표현할 힘이 있을까? 올해 4월, 수업나눔을 할 때, 한 선생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외유내강, 이게 선생님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달란트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 수업 친구의 말에서, 난 다시 나의 가능성을 보았다. 내게는 유약한 면이 있을지라도, 강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이제는 침묵이 아닌 목소리로, 희생이 아닌 선택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제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목소리로 내 삶을 조금씩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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