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흐름 4권
「말들의 흐름」의 여정은 '커피와 담배'를 시작으로, '시와 산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동안 「말들의 흐름」 위에서 유유히 바람을 느끼고, 풍경을 감상하며 산책을 즐겼다. 여러 작가님들의 문체를 접하고 수많은 구절을 만나는 동안, 함께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지나온 그 길은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리고「말들의 흐름」 4권 '시와 산책'은 한정원 작가님이 거쳐온 삶의 표정들이, ‘시’와 ‘산책’이라는 두 가지 매개체를 통해 느꼈던 생활의 빗금들로 채워져 있다. 그 빗금들은 캄캄한 침묵 속에서도 의연히 걸어가는 말줄임표처럼,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달한다. 그녀의 첫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은 문체와, 한 편의 시처럼 깊은 구절들은 읽는 내내 감탄을 자아냈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녀의 시어들과 함께, 조용히, 천천히 산책을 떠난다.
겨울은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 해한 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p.19
세상만사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간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단순히 차갑고 힘든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어진 시간과 과정을 존중해야 한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바라보면 더 고통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겨울은 결국 그 자체의 순서와 역할을 다하고 나서야 떠나가듯, 고통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 지나가는 법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내와 수용, 그리고 시간이 주는 치유의 힘을 이 짧은 구절을 거닐며 성찰했다.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
p. 25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지가 결국 우리 자신을 형상화한다. 칭찬만 듣고 자란 양파는 예쁘게 자라난다. 하지만 욕만 듣고 자란 양파는 그 형상이 기괴하기 짝이 없다. 양파도 이럴진대, 사람은 어떠할까? 우리가 보는 것과 경험하는 것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그 내면의 힘이나 감정이 외부로 드러나며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내면의 변화는 외적으로도 반영된다.
행복은 그녀와 나에게 있지 않고 그녀와 나 사이에, 얽힌 우리의 손위에 가만히 내려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와 생각 사이에 또 행복 같은 것이 있었다.
행복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p. 32
행복은 소유물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에너지, 그 연결 속에서 느껴지는 어떠한 감정이다. 그 에너지는 우리 사이에서 오래도록 흐를 수도, 잠깐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흐르는 에너지의 방향에 맞춰 우리도 흐르면 되는 게 아닌가? 결국 행복은 조건이나 상태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해된다.
괴팍하리만치 도도한 정념은, 지금에 대한 완전한 몰두에서 만들어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는 것도, 자신을 해하는 것도 그렇다. 뜨거운 존재들이 견디고 있는 것은 '지금'이라는 시간이다.
p.61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기는 있었다. 그리고 언젠간 폭풍우가 지나가고 맑은 햇빛을 마주한다. 그 순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냐에 따라 미묘 복잡한 감정을 마주할 것이다. 하지만 폭풍우 속에서는 당장 살아남기도 힘들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맑은 미래는 당장 힘든 현실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나 감정의 강도를 말도 안 되게 강조하나 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인내하며 시간이 흐르길 기도하는 것뿐이다.
노인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은 뼈가 비워지는 탓이겠지만,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단념해서 버려지는 무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몸의 관절이 오래 쓰여 닳듯, 마음도 닳는다. 그러니 '100세 인생'은 무참한 말일뿐이다. 사람에게는 100년 동안 쓸 마음이 없다.
p. 67
나이가 들면 뼈가 약해지고 근육이 빠지면서 몸이 약해진다. 그런 가벼워짐 뒤에는 단순히 신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단념해서 벼려지는 무게'도 있다.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며 삶의 여러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다. 그동안 쌓였던 생각이나 감정을 비워낸다. 이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너지도 닳는다. 결국 사람의 마음도, 몸도 점차 버려지고 비워진다. 그러니 집착, 시기 질투, 충동 등에 에너지를 쏟지 말자. 좋은 감정만 느끼기에도 우리의 유한한 에너지는 모자라다.
마음을 다쳤을 때는 더 간절하게 바다를 찾는다.
속을 드러내기 힘들어하는 내가 그 앞에서는 잘도 털어놓는다.
마다스 왕의 이발사가 숲으로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속삭였다면, 나는 바다로 가서 그렇게 한다. 바다는 나의 비밀을 듣고도 고해 사제처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모래보다 소금보다, 비밀의 밀도가 높을 것이다.
p.78
마음이 다쳤을 때, 위로받는 것이 최고의 약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도 있다. 그런 상처를 남몰래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발사에게는 대나무 숲이, 작가에게는 바다가. 흐르는 바람과 파도는 묵묵히 들어줄 뿐, 어떤 말도 묻지 않는다. 비밀을 듣고도 고해 사제처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 그 무한한 존재의 깊이는 어디까지일까. 시간이 흐르듯, 상처도 그렇게 흐르며 아물어간다. 모든 것은 흐름 속에서 조용히 흘러가고, 결국 우리도 그 흐름에 기대어 다시 나아간다.
사랑하는 마음이 꼭 같지는 않더라도
오늘 밤 내가 보는 이달을
당신이 안 보고 있다고는 못하겠지
p.83
비록 같은 자리에서 함께하지는 못하더라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달을 바라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우리 사이를 좁혀준다. 정말 내 짝이 이 달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믿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따뜻해진다.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더라도, 같은 세상을 공유하며 같은 시간 속을 흘러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랑은 존재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강줄기가 결국 같은 바다로 흘러가듯, 우리는 같은 흐름 속에서 이어져 있다.
문학은 결국 문과 창문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나 보다.
단단한 벽을 뚫어 통로를 내고, 거기 무엇을 드나들게 하고, 때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살피는 일.
이제 나는 가진 것 중 가장 단단한 나무를 재단하고, 사포질을 하고 있다. 이것으로 다시 길고 긴 계절의 틈을, 하룻밤의 간격을 메워볼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P.111
문학이란 작가와 독자 사이를 흐르는 소통의 창구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창문이자 문을 여는 작업이다. 작가는 그 창문과 문을 통해 어떤 것은 들이고, 어떤 것은 차단하며 글을 다듬는다. 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반대로 세상이 글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게도 만든다. 이 과정은 마치 추운 겨울처럼 길고도 고통스럽지만, 그 속에서 끊임없이 다듬고 또 다듬으며 작가와 독자 사이의 간극을 좁혀 나간다. 그 공허한 틈을 메우는 것, 결국 그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며, 독자의 마음을 여는 길이 된다.
산책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길은 계속 이어지더라도, 그만 멈추고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지점이 반드시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일이나 사람이나 꿈을 두고 그런 지점을 느끼듯이.
결심하는 자리에 돌아갈 집이 요술처럼 나타나지는 않으므로, 다시 왔던 만큼을 다 걸어야 한다. 산책의 마지막 기쁨은 돌아가는 길을 얼마나 순순히, 서두리지 않고 걷느냐에 달려있다.
p.155
산책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길을 따라 걸어도, 어느 순간 우리는 멈춰야 한다. 그러나 그 끝이 아쉬워도, 우리는 다시 돌아갈 길을 걸어야 한다. 시도 그렇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더할 수도 있지만, 결국 어느 순간 멈춰야 한다. 더 이상 단어를 붙이지 않아도 온전해지는 순간이 오듯이.
길은 계속 이어지지만, 우리에게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온다. 저 너머에도 풍경은 이어지지만,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때가 있듯이. 시도 끝없이 이어질 수 있지만, 가장 적절한 한 줄에서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시는 무거워지고, 길은 지루해진다.
산책이 끝난다고 해서 곧바로 집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지나온 길을 다시 되짚어야 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행을 쓰고 나서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길 위에 남긴 발자국을 발견하고, 시 속에 숨겨둔 감정을 되새긴다.
산책의 마지막 기쁨은 돌아가는 길을 얼마나 서두르지 않고 걸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시도 그렇다. 마지막 행을 적은 후, 그 여운을 조용히 곱씹을 수 있다면, 그 시는 좋은 시다.
산책과 시, 결국 그것은 삶과도 닮아 있다. 어디까지 걸을지, 언제 멈출지, 어떻게 돌아올지를 고민하는 모든 순간이 하나의 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