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5 오늘의 일기, <혁명>을 들으며 혁명을 꿈꾸다
1. 음이,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 저 애처로운 음계가 그야말로 산산조각나 깨질 것처럼 위태롭게 울리는 쇼팽의 <혁명>이 흐르고 있던 때마침, 생각은 없되 우울만이 가득한 이런 기분으로만 하루를 보낼 수 없다는 오기를 원동력 삼아 억지로 손에 든 책의 서문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 서문보다 조금은 덜 잔혹한 본문에서 나는 출구를 탐색한다.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는 삶에 관해서만 다룰 수는 없다. 책은 사이 공간에서 이미 시작된 혁명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삶 속의 혁명이자 다른 삶을 위한 혁명이다. 이것은 "시대가 그들의 투쟁과 희망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이렇게 카를 마르크스는 비판철학의 과제를 규정했다.) '삶을 위한 혁명'이라는 제목 아래 나는...(이하 생략)
- 에바 폰 레데커 저, 임보라 옮김, <삶을 위한 혁명- 죽음의 체제에 맞서는 새로운 저항들의 의미>, 민음사, p.15
2. 그러고서 생각하니 한때 내가 바라던 것은 '구원'이었다. 구원을 기다리던 때의 나는, 설령 삶의 고통이 어떤 느낌인지는 흐릿하게나마 이해하였대도 그 고통의 이유 혹은 고통의 결론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고통의 시작과 과정과 끝,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원하고 기대고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꼭 그만큼의 무지로만 가능했던 탈출, 즉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는 '구원'이었다.
3. '24년 3월, 지금의 내가 바라고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제 구원이 아니라 감히, '혁명'이다. 혁명이란 지금 이 시대를 철저히 아는 사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의식한 사람, 지금이 당최 왜 문제일 수밖에 없는지 자신 있게 발언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이 문제를 어디로 어떻게 옮겨가야 할지를 모두 아는 사람만이 혁명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침공당한 조국에 슬퍼할 줄 알았던 쇼팽은 <혁명>을 썼고,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낱낱이 고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는 삶 속의 혁명, 다른 삶을 위한 혁명을 부르짖는 책을 썼다.
나는 조용히 <혁명>을 들으며, 혁명을 천명하는 책 한 권을 자랑인 양 바라보다, 언젠가는 나도 혁명가가 되겠노라고, 그러니까 선과 악의 문제건 자본주의의 몰인간성이건 이 사회의 폭력성과 잔인함이건 그러니까 이제는 무지의 영역에선 약간 벗어나 조금은 알 것 같은 무언가를 위해 '언젠가는' 힘쓰겠노라고 '정말' 언젠가는 주먹이건 펜이건 들고 '진짜' 일어나보겠노라고 이쯤 되면 아는 거라고
4. 무언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꼭 무언가 되어야만 감히 더 큰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조급함을 늘 동력으로 삼아 나를 찾아온다. 하지만 나는, 선하다는 미명 아래 때때로 우스운 사람, 아직 논문도 프로젝트도 스스로 일구어 나가기에는 부족한 사람,... 기실 기억의 흐릿한 시작에서부터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부족을 조금씩 채워가는 과정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애써 하며 지내고 있다가 문득, 무서워졌다. 끝끝내 나는 가능성을 틔우지 못할 '저평가 우량주'로만 남을 것 같았다. 가련한 내 가능성을 이룰 수 없어서만 슬픈 것은 아니었다. 끝끝내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 손으로는 영영 혁명을 일구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5.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류의 역접으로 이 글을 시작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옆을 지켜주는 반려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참 우습게도, 아무도 괴롭게 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꺾이고 쓰러져 백기를 든 아이가 되었을 것 같다. 나의 불가능성으로, 이뤄내지 못할 많은 것들에, 나는 끝없이 무기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