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았는데 품에 안아보기는커녕 100일이 되도록 손도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엄마’가 있었다. 아기가 1.4kg의 극소저체중아로 태어나 신생아 중환자실의 인큐베이터에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 홈페이지에는 신생아 중환자실의 입원 아기 정보(체중, 먹는 우유 양)가 매일 업그레이드되어 올라왔다. 엄마는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고 아기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전날보다 아기의 체중이 10g이라도 늘고, 우유를 조금이라도 먹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면 엄마는 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졌다.
그러나 아기는 먹는 날보다 금식인 날이 더 많았고, 날이 갈수록 체중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었다. 하루 두 번 허락된 면회를 갈 때마다 아기는 온몸으로 울고 있었지만, 우는 아기를 안아 줄 수조차 없던 엄마는 제 가슴을 쥐어뜯을 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만 커져갔다.
감염의 위험 때문에 엄마조차 아기 손 한 번 못 잡게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기는 반복적으로 세균 감염에 노출되고 끊임없는 항생제 치료가 이어졌다. 3번째 패혈증에 걸렸을 때는 솔직히 의료진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러나 불만이나 의구심을 절대 밖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아이의 생명이 그들 손에 달려 있으므로...
(실제 2017년 서울 이화여대 목동 산부인과에서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받던 신생아들이 세균 감염으로 집단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처럼 사건화 되지 않지만 면역력이 약한 상당 수의 미숙아들이 치료 중 원인 모를 세균 감염으로 목숨을 잃는 것이 현실이다.)
한 번 패혈증에 걸리면 그 작은 몸은 세균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엄마는 아기가 입원해 있는 동안, 세균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 미숙아들을 실제로 여럿 보았다. 다행히 싸워 이긴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는 경우도 많았다. 장애가 남는 것이다. 자신의 아기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졌다. 한 달, 두 달, 석 달, 시간이 흐를수록 아기의 상태는 더 악화되어 가고, 엄마는 더 이상 병원만 믿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인큐베이터에서 집중치료받던 모습
사람이 궁지에 몰려 다급해지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엄마는 스님, 목사님, 신부님, 심지어 도인, 무당까지 찾아갔고, 새벽마다 깨끗한 물을 떠놓고 천지신명님께도 빌었다. 아는 모든 신들에게 기도했다. 살면서 그렇게 간절했던 적이 없었는데 기도에 대한 응답은 없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손 내밀어준 사람들이 있었으니,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바로 미숙아를 둔 같은 처지의 엄마들이었다. 미숙아 맘 인터넷 카페에서 엄마들은 다양한 정보와 치료 경험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큰 힘을 얻었다. 엄마들은 미숙아를 ‘희망둥이’라고 불렀다.
엄마들의 희망은 오직 하나, ‘인큐베이터 탈출’, 희망둥이를 자신의 품에 안고 퇴원하는 것이었다.
아기의 백일을 앞두고 엄마는 결단을 내렸다.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기를 서울 큰 병원에 옮기기로 한 것. 당시 아기의 배는 복수가 가득 차서 누르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있었고, 야위디 야윈 팔다리는 백일이 되도록 수없이 찔러댄 주삿바늘 때문에 온통 피멍이요,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아기는 태어나 처음으로 인큐베이터 밖을 나와 엄마 품에 안겼다.
엄마는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아기를 품에 안았는데, 안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아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솜털도 그보다는 무거울 것 같았다. 당시 아기의 몸무게가 겨우 1kg 정도였으니 그럴 수밖에. 가슴이 저며왔지만 그래도 아기를 안을 수 있는 것만으로 잠시 행복했다. 엠블런스 타고 부산에서 서울 병원까지 가는 험한 여정이고, 또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서울의 병원에 도착해서 바로 응급실로 들어가 피검사부터 했다. 의료진은 아기의 감염 수치가 너무 높아 다른 검사를 하며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드라마에서나 듣던 말을 실제로 듣게 될 줄이야. 다음 날 아침으로 수술이 잡히고, 개복하여 아이 배 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뒤 수술방법을 결정할 거라고 했다.
부산의 병원에서도 수술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기가 너무 작아 전신마취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며 쉽게 결정을 못 내렸던 터였다. 그런데 서울 병원에 오자마자 수술해야 한다니... 마음을 굳게 먹고 서울행을 택했던 엄마지만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담당 의사에게 떨리는 음성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 이전 병원에서 전신마취 자체가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수술해도 괜찮을까요?”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저희는 이런 수술 일주일에도 여러 건 합니다.”
한마디로 자신 있다는 뜻이었다.
의료진의 자신감 넘치는 말 한마디!
그 말은 그녀에게 ‘구원’의 말처럼 들렸다. 어둡던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쳐 들고 있었다...
엄마는 그때 ‘말의 힘’을 깨달았다. 아기의 상태를 두고 똑같은 상황에서 두 의료진의 말과 접근방식은 달랐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설명하는데 무게를 두느냐, 보호자의 마음을 우선 안심시키느냐. 의료진의 말 한마디에 가족의 마음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데...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말을 덧붙이자면, 부산에서 입원했던 병원 의료진들 또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치료해주셨다. 다만, 서울 병원보다 임상 치료 경험이 많이 부족하여 생기는 의료격차라고 생각한다. 이 또한 물적, 인적 자원 부족이 한 원인이겠지만.)
4시간 넘게 걸린 수술은 무사히 잘 끝났다. 부패된 소장을 30cm 정도 잘라내고, 다시 잇는 수술이었는데, 소장 이외의 장기는 손상이 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수술 이후엔 신생아 중환자실 중에서도 감염 위험이 적은 독립된 공간에서 며칠 상태를 지켜본다 했다.
엄마는 그동안에 응급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어 어디 가지도 못하고, 중환자실 바깥의 보호자 대기실에서 쪽잠을 자며 혼자 며칠을 버텼다. 외롭고 몸도 고단했지만, 여전히 인큐베이터 안에서 수술 이후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 아기를 생각하면 엄마는 고생이랄 수도 없었다.
수술하고 5일 차 되던 날, 담당 의사는 아기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며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병실로 옮길 거라고 했다. 엄마는 깜짝 놀랐다. 일반 병실로 옮기면 감염의 위험이 더 커질 텐데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때 의사 선생님은 단호히 말씀하셨다.
“어머니 품보다 더 좋은 인큐베이터는 없습니다. 이제 어머니 품에서, 어머니가 직접 돌보세요”
엄마는 뒷걸음질 치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확신에 찬 그 말씀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일반 병실로 옮긴 이후 엄마는 24시간 아이와 함께 있었다. 잘 때도 품에서 놓지 않았다. 아기는 우유를 1cc부터 시작하여 하루하루 그 양을 조금씩 늘려갔는데 문제없이 소화를 잘 시켰다. 엄마는 눈 앞에서 기적이 펼쳐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인큐베이터에서 나와 일반병실에서, 엄마 무릎에 앉아 아빠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하여 수술한 지 한 달 만에 아기는 ‘꿈의 몸무게 2kg’에 도달할 수 있었고, 담당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퇴원을 명 받았다!!
아기는 1.4kg으로 태어나 퇴원 가능 목표 체중 2kg에 도달하기까지 무려 4개월이 걸렸다. 희망둥이는 이른 봄에 태어나 한여름이 되어서야 인큐베이터를 탈출, 엄마 품에 안겨 집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