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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Aug 07. 2024

29살, 권고사직을 당했다.

회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EP.1

지난 5월 말, 여느 때와 같이 고양이 세수만 하고 책상에 앉아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팀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다지님, 출근하자마자 연락 줘요. 내가 바로 전화할게요." 


평소 내가 전화로 대화하는 것에 약간의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되도록이면 채팅창을 통해 업무 지시를 내려주시던 분이었다. 순간 내가 큰 실수를 했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걸 또 바로 캐치하신 것인지 약 1분의 텀을 두고 다시 카톡 하나가 왔다, "아, 혹시 걱정할까 봐 말하는 건데 다지님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회사와 관련된 일인데, 미리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요." 


몇 주 전 새로 오픈한 매장에서 처음으로 비즈니스 데이를 오픈했는데, 그 결과가 엄청 좋았던 걸까? 아니면 내가 업무에 잘 적응하고 있어서 더 어려운 과제를 주시려나? 지난 미팅 때 언급되었던 팝업 프로젝트가 진행되나? 평소 최악의 케이스를 먼저 떠올리는 편인데, 신기하게 이날만큼은 머릿속에서 수십 번의 행복회로를 돌렸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은 알고 있었던 걸까, 곧 네 인생에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니 행복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잘 보호하고 있는 게 좋겠다고. 


슬랙에 출근했다고 알림을 켜자마자 5분도 되지 않아 팀장님께 전화가 왔다. 전형적인 ENFP의 모습을 가진 언제나 당당하고 겁 없고 웃음이 많은 팀장님의 떨리는 목소리를 이번에 처음 들어봤던 것 같다. 


"다지님,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어요. 너무 갑작스럽게 소식을 전하게 되어 미안해요. 나도 지난주에 알았어요. 그리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몸에 흐르던 피가 순식간에 파사삭 식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오랜 시간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내려온 듯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미치게 아파왔다. 데일리로, 주별로, 달별로 매출 데이터를 확인하는 마케터로서 이렇게 가다간 언젠가는 큰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리포트를 올려도 매출과 관련한 특별한 액션 플랜이 주어지지 않았고, 서울에서 비싸다고 소문난 곳에 새로운 매장을 오픈하게 되면서 회사가 믿는 구석이 분명 있을 거라 안심했다. 투자받은 돈은 진작 날아갔으며, 그 모든 것이 다 빚이었다는 걸 듣기 전까지는.


무섭게 요동쳤던 심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가라앉았고, 나는 무섭도록 침착해졌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내 앞에 닥친 문제적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었다. 


"팀장님, 그럼 저는 언제까지 일하게 되나요? 지금까지 해온 프로젝트들은 없는 게 되는 건지, 만약 이번달까지만 일하게 된다면 제가 어떤 걸 하고 나가면 되는 건지 알려주세요. 실업 급여와 퇴직금은 어떻게 되는지는 HR팀에 여쭤보면 될까요?" 


업무를 할 때도 정확한 타임라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선순위에 대한 질문이 끊이질 않았던 팀원에게 P를 대표하는 팀장님은 얕게 웃으시며 말했다. "그런 걸 먼저 걱정하는 게 신기하다. 바로 욕하면서 도망가도 나는 할 말이 없고, 회사에서도 미안하다고 밖에 못하는 입장이었을 텐데." 


직장인으로서 당연한 소리겠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퇴사를 떠올렸던 순간들은 종종 있었다. 비슷한 직군에 있는 동기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연봉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10만 원의 인센티브, 꼭 필요할 때 쓸데없이 작동하는 워라밸과 비효율의 끝판왕이었던 수많은 회의들. 첫 회사생활을 미국 회사로 시작해서인지 몰라도 가끔은 이곳에서의 업무 방식이 너무나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이 통쾌하기보다 마음이 아팠던 건, 내가 꿈꿨던 '브랜드 마케터' 업무를 처음으로 할 수 있게 된 곳이었고, 대형 팝업이나 매장 오픈뿐 아니라 브랜드 매거진 제작과 모든 프로모션 기획까지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성격이 맞지 않는 동료들이 있기는 해도, 모두 기본적으로 자기 일에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기에 서로의 일을 존중하고 멋있어하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풀 재택근무가 가능하다는 것도 차멀미가 심한 나에게는 매우 큰 혜택이었다. 덕분에 길바닥에 버릴 에너지를 차곡차곡 쌓아 더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다.


나의 퇴사처리는 꽤나 빠르게 진행되었다. 팀장님과의 통화가 있고 나서 다음날 오전 대표님, 인사팀과 미팅을 하고 약 일주일 후 나는 사직서에 사인을 했다. 이유는 '회사의 경영악화로 인한 권고사직'이었다. 


그 어떤 팀보다 가장 먼저 회사가 나아갈 방향과 전략을 짜는 마케팅 팀의 일원으로서 갑작스럽게 진행된 퇴사는 한동안 커다란 허탈감과 좌절을 선사했다. 긍정적인 미래를 바라보며 기획했던 프로젝트들은 이제 내 손에 없고, 회사가 그렇게 되는데 내 잘못도 있을 것 같아 하루하루 무기력하고 나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러던 도중, 함께 일하던 팀원분과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같은 문제도 다르게 보고 있는 그분의 말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나를 멈추게 했다. "다지님, 회사가 망하는 건 우리의 실패가 아니에요. 우리는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시 꾸려가면 되어요." 


연인과 함께 여름의 향을 물씬 담은 바디 프로필을 촬영한다는 팀원분의 표정은 그 어떤 때보다 밝았다. 퇴사도 했고 실업급여도 받으니, 당분간은 운동에 신경 쓰고 블로그를 하면서 자신에게 집중하겠다는 말이 어찌나 아름답고 멋있게 느껴지던지! 그때 나는 결심했다. 29살의 백수 생활을 나에 대한 자책과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보내지 말자고. 얼마나 될지 모르는 이 소중한 시간들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혹은 일한다고 미뤄왔던 도전들로 가득가득 채워보기로. 비록 한 번의 시도로 포기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생각해 보면, 겨우 3년 차 병아리 마케터지만, 그동안 나의 삶은 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직장인이 되면 스스로를 쓸모 있고 부지런하다고 생각하고, 퇴사를 하면 쓸모없고 게으르다고 생각하면서. 게다가 이번 퇴사는 무려 29살의 나이와 애매한 경력에 맞닿뜨렸으니 더 크게 휘청했던 거다. 


얼마 전 올림픽에서 0점을 쏘고 탈락했음에도, '0점을 쐈다고 세상이 무너지나요.'라고 말했던 김예지 선수의 마인드를 닮아보기로 한다. 퇴사했다고, 권고사직 당했다고, 잘 다니던 회사가 망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회사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내가 만드는 나만의 세상이 더욱 튼튼하고 건강할 수 있도록 브런치에 차곡차곡 기록해 봐야겠다. 이제, 꼭 회사에 있지 않아도, 직장인이 아니어도 내가 충분히 쓸모 있다고 믿고 싶어서.




** 이번 시리즈는 브런치 연재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마다 천천히, 마음 갈 때마다 기록해보려 합니다. 혹시 저처럼 예상치 않은 퇴사로 길을 잃은 분들이 계시다면, 제 글이 조금이나마 위로와 웃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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