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2화
회사의 경영악화로 인해 눈 깜짝할 사이에 권고사직을 당하고, 이직한 지 1년 7개월 만에 다시 백수가 되었다. 사실, 약 2주 정도는 이 모든 것이 간밤의 꿈처럼 현실과 구분이 잘 되지 않아 멍한 날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재택으로 일을 했었기에 매일 마주하는 아침 풍경은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을 새워서라도 맡은 일을 끝내야 직성이 풀리고, 회사를 다녀야만 나의 존재가 비로소 인정받는 것 같다는 배우자의 퇴사 소식에 남편은 꽤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첫 직장과 이별 후 취업을 준비할 때 통제할 수 없이 밀려오는 눈물과 끝없는 우울감에 지쳐있었던 걸 내 모습을 알기 때문일까.
다행히 나는 퇴사 후 눈물과 아픔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내가 왜 살아야 하지? 할 수 있는 게 없는데.'라는 생각이 뇌에 미쳐 닿기도 전에 눈이 떠지고 손 발이 바삐 움직였다. 나에게는 이제 책임져야 할 가족이 생겼고, 이 아이의 온생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우엉이를 입양한 건 지난해 5월. 몸에 닿는 바람이 너무 포근해서 웃음이 절로 나는 날이었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동생의 선배가 우연히 우엉이 사진을 보여주며, 입양이 가능한지 물어봤다고 했다. 충북 영동에서 포도밭을 하시는 선배의 어머니가 시골 길냥이를 돌봐주고 계셨는데 얼마 전 7마리를 출산했다는 것이었다. 다 키울 형편은 안되고, 보호소에 보내면 열악한 환경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안락사 대상이 될 확률이 높아서 주변 지인들을 열심히 설득하는 것 같았다.
결혼식을 앞둔 봄, 국제커플의 평생 숙제인 '정착 나라'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지만 이미 우리는 입양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주문하고 있었다. 아무리 멀리 가게 되더라도 꼭 품에 안고 가겠다고 약속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오래 함께하고 싶어 우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몸에 동그란 반점이 있는 것이 귀여워서 'o'이 많이 들어간 음식 이름을 찾았다. 겨우 400g이 넘는 몸을 가진 작디작은 아이가 혹여 오는 도중 잘못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준비한 파우치들이 무색하도록 우엉이는 병아리처럼 몇 분을 울더니 내 가슴에서 잠이 들었다. 첫 이틀은 밤새 우는 우엉이 옆을 졸린 눈을 비비며 지켰는데, 그 후로는 밥도 물도 잘 먹으며 더 이상 숨숨집이 아닌 우리의 가슴팍에서 잠들기도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29살 상반기 회고를 하며, 역시나 올해도 성공보다는 퇴사로 인해 한 발자국 꿈에서 멀어진 것이 아닐까 고민을 했었다. 계획했던 유튜브 편집도, 브런치 공모전도, 중간관리자로의 성장 그 어떤 것도 이뤄내지 못한 걸 보면서 나는 어쩌면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아까운 게으름뱅이는 아닐까 자책도 했다. 컴컴한 옷방의 문을 쾅 닫고 축 늘어진 어깨를 씰룩거렸을 때, 문 앞에서 우엉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냐-옹, 냐 -----옹". 마치 '엄-마, 엄----마"라고 들리는 듯한 우엉이의 앙칼진 목소리에 눈물이 쏙 들어가고 픽 웃음이 났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눈앞에서 잠시만 사라져도 간절히 나를 찾아주는 존재가 있었다. 그래, 시골 비닐하우스에 담겨 있던 400g의 아가 고양이를 5.5kg의 건강하고 행복한 청소년 고양이로 잘 키워낸 것도 나의 성과였다. 이 모든 것이 처음인 초보 집사가 입양 준비부터, 백신, 중성화 수술을 거쳐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받는 엄마가 되었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으니까.
그런 우엉이 덕분에 나는 오늘도 9시 30분에는 일어나 부지런히 청소기를 밀고, 화장실 모래를 갈고, 맛있는 밥과 깨끗한 물을 준비한다. 더 오래 함께하기 위해 주 3일 요가원을 가고, 술을 1달에 1번만 마시며 편함의 상징이던 밀키트를 끊었다. 예전에는 침대에서 나오는 게 너무나 힘들고, 계속 눈을 감고 있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귓가에서 들려오는 골골송과 비단보다 부드러운 우엉이의 털이 하루의 시작을 기분 좋게 만든다.
오피스 밀집구역에 살다 보니 여전히 깔끔한 정장에 사원증을 목에 맨 직장인들을 볼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나만 이 경쟁에서 뒤처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29년 중 27년을 한국에서 살았으니 쉽게 바뀌진 않는 습관이다. 그럴 때마다 잠시 깊게 숨을 내쉬고 그 이유 모를 불안감 속에서 우엉이의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해 본다. 고양이답지 않게 캐치볼 하는 걸 좋아하고, 고등어 간식에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햇빛 아래 혀를 살포시 내밀며 낮잠을 자는 귀여운 얼굴을 말이다. 그러다 보면 남들처럼 회사에 가지는 않아도, 하루종일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인정할만한 결과물을 만들지 않았어도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입가에 웃음이 돈다. 전업집사로 취업한 요즘, 내 인생이 꽤나 쓸모 있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우엉이는 침대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곤히 자고 있다. 우엉아~하고 부르면 이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이 "엄마 오늘도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의미 같아 기쁘다. 혹시나, 나처럼 회사가 아닌 곳에서는 금방 길을 잃어버리고, 나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껴진다면 주변을 둘러보자. 꼭 고양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내 몸 하나를 챙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아직 침대에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 필요한 만큼 침대에서 에너지를 채운 후 나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찾아보면 된다. 이불을 예쁘게 개거나, 밀린 빨래를 하거나, 제철 음식으로 요리를 한다던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일상의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걸 추천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다시 기운을 내서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라 믿는다. 우엉이와 몇주를 뒹굴거리며 놀기만 한 후에 포트폴리오를 다시 만든 나처럼.
오후 5시, 우엉이 옆에서 낮잠을 잘 시간이다.
내 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아이지만, 1분 만에 불면증이 사라질 정도로 따뜻한 기운을 내뿜는 이 아이 옆에 기대 본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이런 편안함을 느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껏 행복하길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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