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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정 Mar 23. 2024

소스를 모으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왜 소스를 모을까? 한번 냉장고 안을 샅샅이 살펴보자. 혹시 머스터드 소스, 케찹소스, 핫소스 등등. 여기저기서 받은 소스들이 나의 공간을 침범하고 있지 않은가?


언제부턴가 이 소스녀석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배달하면 매번 같이 딸려오는 이 친구들은 어떨땐 반갑기도 하고 어떨땐 불편하기도 하다. 조그맣게 자리잡기 시작한 소스들의 자리는 어느순간 내 공간을 옥죄어오기 시작한다.

사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흔히 접하게 되는 게 시럽병이다. 병원에서 약처방을 받아 집에 오면 (아이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늘 시럽통의 반 정도가 남는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버리기는 왠지 아까워서 냉장고에 넣는다. 시럽병이 하나둘 쌓여간다. 사실 내가 강동경희대병원에서 근무할 때 소아과병동에 배치받으면서 굉장히 많은 시럽들을 보고 약을 재고 보호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물론 병원 내 약사가 매 처방마다 약 시럽을 재어 주는데, 나의 주된 업무는 아이들이 열이 날 때 (보통 38도 ~ 39도 이상 고열 일 때) 해열제를 처방하게 된다.


아이들이 열 날때마다 약사가 해열제를 재어줄 수 없기 때문에 병동 간호사들이 타이레놀, 멕시부펜(부루펜 계열의) 해열제를 처치실에 보관해두고 아이들의 몸무게에 따라 (처방에 따라) 투약하게 된다. 이때 해열제도 있지만, 아이들이 먹다가 토하거나 뱉어내는 경우를 대비해 상비약으로 진해거담제, 지사제 등 다양한 시럽을 비상시에 대처하도록 준비해둔다.


냉장고에 소스 보관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시럽도 늘 한칸을 차지한다. 사실 시럽의 경우는 실온보관이 맞다. 일부 항생제의 경우는 냉장보관을 요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시럽제는 실온보관이다. 사실 약이란 것이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준비해두는 것이기도 하기에, 한달 이상 보관을 하게 되면 냉장고에 보관하기도 한다.


나도 아이들이 흔히 열날 때 먹는 타이레놀 시럽이나 멕시부펜 계열의 해열제는 냉장고에 늘 보관해둔다. 다른 음식들과 섞여있지 않게 별도의 칸에 분리보관해둔다.


최근 이사를 하면서 냉장고를 한번 정리한 적이 있다. 냉장고 뿐만 아니라 서랍장 안에 켜켜이 보관해두었던 미니멀사이즈의 시럽 종류도 한꺼번에 싹 버렸다.

평상시에는 잘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하나둘 쌓여가는 소스들이 언젠가부터 불편해졌다. 혹시 모르잖아? 그런 마음이 소스를 챙겨두게 만들었다. 하지만 혹시모를 순간은 그렇게 자주 오지않았다. 아니 거의 오지 않았다.


배달을 시키거나, 늘 딸려오는 소스들을 볼 때면 그 당시에 맛있게 먹으면 그 뿐! 챙겨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거나, 한개만 있으면 왠지 아쉬운 (핫소스 같은) 소스는 챙겨둘 만 하지만 이제는 남은 반찬이나 소스들에 미련두지 않기로 했다.


최근 책방에서 독서모임에 오는 J 양이 구매한 요리책은 한그릇음식 요리였다. 이런저런 반찬이 많을 때도 좋지만, 하루 세끼를 (바쁜 맞벌이 엄마아빠가) 진수성찬으로 챙겨먹기는 힘들다.

아이들도 사실 한그릇요리를 좋아한다. 나 역시 맛있는 음식 하나라도 있으면 밥이 꿀떡꿀떡 넘어가게 된다. 이런저런 반찬은 가끔 반찬가게에 갈 때 즐기고, 평소에는 한그릇 요리로 대체한다.


불고기 덮밥도 좋고, 참치밥도 좋고, 카레라이스도 좋다. 나는 배달의 민족에서 배달음식을 주문해도 '반찬은필요없음' 을 체크한다.

이런저런 반찬이 함께오면 당연히 좋지만, 뒤처리가 늘 곤란하다. 포장용기를 뜯기도 귀찮을 때가 있다. 내가 원하는 메인요리를 맛있게 아주 맛있게 먹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남편도 아이들도 반찬에 손을 대지 않는다. 나만 김치나 곁가지로 오는 반찬들을 먹는데, 먹는 양에도 한계가 있기에 늘 반찬이 남는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같이 딸려오는 반찬을 받지않게 된 것이다. 하나라도 덜면, 포장용기도 덜어진다. 외식을 하거나 바깥에서 먹게 될 때 마주하는 반찬들이 나는 좋다.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 좋고, 바깥에서는 내가 뒤처리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되서 더욱 좋다.


냉장고는 더이상 소스들의 저장고가 아니다. 시럽병의 저장고도 아니다. 남은 반찬들의 저장고도 아니다. 버릴 음식은 어차피 버려진다.

지금 안먹는 음식은 사실 나중에도 안 먹는다!!!! 지금 냉장고를 한번 열어보자. 특히 냉동실을 한번 열어보자. 켜켜이 쌓여있는 음식들이 있는가? 냉동실이든 냉장실이든 잠시 보관하기 위한 용도이지 저장고는 아니다.

내가 먹지않을 음식들에 미련두지 말자. 내가 먹고싶은 음식,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에 관심을 가져보자. 우리 몸은 쓰레기통이 아니다. 예전에 음식이 귀하던 시절과는 사뭇 달라졌다. 맛있는 음식을 소중한 사람들과 맛있게 먹어보자. 그 시간을 즐겨보자. 음식에는 만든 사람의 정성, 먹는 사람의 기쁨이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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