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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26. 2020
#2 심장이 뛰는 건 산소가 희박해서만은 아닐 거야
라다크의 수도 레에서 하루하루 시간들
아이들이 아프기 시작한 것은 레에 도착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다. 그 흔한 산소라는 존재 때문에 이처럼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숨 쉬기가 힘들어요. 머리가 지끈거리고, 누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요!”
열여덟 살 유진이. 스무 살 솔지도 마찬가지였다. 체한 것처럼 아프다고 해서 열 손가락을 다 따주었지만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열다섯 살 ‘해남 촌놈’ 남수도, 동갑내기 축구선수 정민이도, 막내인 열네 살 우현이도 속이 메스껍고 숨이 가쁘다고 고산병 증세를 연이어 호소했다.
사실은 나 역시 심장박동수가 정상범위를 벗어나 한껏 속도를 올리던 참이었다. 아프지 않은 사람보다 아픈 이가 더 많아져, 게스트하우스는 여행자 병동이 되어 갔다.
그리하여 하루 동안 활동 금지령을 내렸다. 우리들 몸이 산소가 적은 이곳 고산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산소 소비량을 최소화하라고 당부했으나, 아이들은 아이들이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곧 떠나게 될 히말라야 트래킹을 위해 등산화, 선글라스, 장갑 등을 산다는 핑계로 낯선 도시의 골목골목을 야금야금 탐험하고 다녔다. 그러다 헤나 염색약을 사 와서 숙소에서 염색을 하기도 하고, 길을 잃고 헤매다 만나게 된 라다크 친구를 자랑하기도 한다. 고산병을 등에 지고도 아이들은 새로운 세계에 한 발씩 다가서고 있었던 셈이다.
"심장이 뛰는 건 산소가 희박한 때문만은 아닐 거야"“심장이 진짜 무지하게 아프다. 막 쿵쿵쿵거리고 조금만 걸어도 심장이 찢어질 것 같고. 심장이 아프니까 뒷목도 땅기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삼촌이 맥박을 짚고 가셨는데 106이란다. 뭐 1분인가 그 기준일 텐데, 내가 애들 중에 최고랬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유진)
“레라는 곳에 왔는데 재미있는 곳 같다. 신기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몸살이 났다. 고산지대여서 산소가 부족해서인 것 같다. 쉬어야겠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정민)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모둠원들끼리 협의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다. 학교에서처럼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아니어서 좋다. 다혜와 구석진 노점상이 있는 골목을 다녔다.
다혜는 100루피짜리 장갑 하나를 샀고, 나는 150루피 버선을 130루피에 깎아서 샀다. 다혜는 또 티셔츠를 230루피에서 200루피로 깎았다. 풋, 우리는 깎기 신이닷!! 아, 맞다! 헤나 염색약도 샀다. 붉은빛 갈색을 사서 숙소에서 다혜랑 생~쇼를 하며 염색했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민아)
“길을 찾는 일이 생각보다 재밌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거닐었다. 한국에서 난 ‘길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무언가 두려워 새로운 길로 가지 않는다. 그러다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상을 만났다. 팔찌에 관심을 가지자 자루에서 팔찌를 몽땅 꺼내 보여주려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말렸는데 괜찮단다. 주인은 “Slowly, slowly. That’s OK.”라고 말했다. 내가 조급해하고 있었구나, 그때 알았다. 그 말에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며 그냥 땅바닥에 앉아버렸다. 주인이 괜찮으냐고 물었고, 난 지금 이렇게 앉아있는 내 모습이 좋았다.
팔찌를 사고 나서, 이번에는 라다크 할머니와 두 손자를 만났다. 셋 모두 영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한국어로, 그들은 라다크어로 대화를 하였다. 이름을 물어보았지만 대답 대신 자신의 과자를 건넸다. 자신의 과자를 건네던 여섯 살 남자아이. 그 과자와 그 아이의 손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아라)
일상의 삶과 여행이 골목길에서 만날 때이튿날 아침. 하루를 꼬박 쉰 후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주머니께서 교사로 계신 곳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루 사이에 아이들이 기운을 차리고 있다, 고 판단한 것이 실수였다. 괜찮던 아이들까지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고산을 여행해본 이라면 알 것 같다. 고산병에는 고통보다 더 힘들고 무서운 것이 있다. 고통에 앞서 달려오는 두려움. 모든 고통이 호흡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호흡할 때마다 심장이 찌릿찌릿 아파오고, 불규칙한 호흡 끝에 내 몸이 땅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이러다 혹시 내 몸이… 내 심장이… 영원히 숨 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그럴 때 아이들의 입 밖으로 다음과 같은 말들이 흘러나온다.
“삼촌, 제가 이 여행을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요?”
“걷는 것조차 이렇게 숨이 가쁜데, 히말라야 트래킹을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될까요?”
그리고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는 아이들도 있다.
"도대체 나는 왜 이 힘든 여행에 따라나선 걸까요?"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우현)
“레에 온 지 어느덧 3일째. 그런데 아직도 일어나면 머리가 아프다. 그리고 조금씩 숨이 차다. 이러다 트래킹이 힘들까 봐 너무 걱정된다. 라다크까지 왔는데 트래킹을 못하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솔지)
“머리는 띵하고 몸에서 열이 나는데 춥고… 제일 힘든 건 두통. 걷는 게 힘들어 모둠 아이들에게 자꾸 쉬어가자고 했다. 그럼에도 다시 걷기 시작하면 두통은 곧장 나를 따라와 힘들게 했다. 이번 여행… 이 고산증을 참아낼 수 있을까…?”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진실)
라다크에선 그 어느 언덕이든 하늘을 걷는다 인도 라다크는 히말라야 품속에 자리한다. 그 말은 대부분 지역이 해발 4000미터를 오르내리는 고산지역이라는 뜻이다. 즉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고산병에 노출되는 곳이다. 만약 한 명이라도 고산병으로 위급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다시 델리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했다. 그다음, 우리들의 여행은 결말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했다.
청소년 14명과 함께 이런 하드 한 여행을 계획한 것 자체가 욕심이었던가.
결국 그날 오후, 우리들은 도시 외곽에 있는 SNM 병원을 방문했다. 레에서 제일 큰 병원이었지만 건물은 낡고 의료기기는 열악해 보였다. 하지만 병원은 진료비를 받지 않았다. ‘오래된 미래’의 도시답게 방문자들의 자발적인 기부에 의해 운영된다고 했다. 의사는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정성껏 진단해주었다. 그리곤,
“외국인이라면 모두가 겪는 과정이니까, 다 괜찮아질 거예요.”
라고 말해주었다. 모두가 겪는 과정이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모두 다. 그 몇 마디의 말들이 그 어떤 치료보다도 고마웠다. 밝아지는 아이들 얼굴을 보며 의사의 그 부드러운 언어의 힘만이 그들을 낫게 할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길 위에 선 여행자에겐 따뜻한 말 한두 마디가 그처럼 소중한 법이다. 유진과 진실 두 녀석에게만 ‘산소 마시기 30분’ 처방이 내려졌다. 아이들은 낡은 침대 몇 개가 놓인 치료실에서 다 함께 기다렸다.
잠시 후 간호사가 대형 포탄처럼 생긴 산소통을 끌고 들어왔을 때, 나도 아이들도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국립병원 전문의가 내린 처방이 ‘산소 마시기’라는 것부터가 예능 같았던 날에, 마셔야 할 산소통이 너무 크고 투박했던 탓이다.
“누나~!! 산소 맛있어?”
정호랑 우현. 아이들은 산소 호흡기를 물고 조금 우스운 꼴이 된 유진이랑 진실이를 놀려먹느라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다. 언제 고산병 증세로 아팠는지, 또 언제 히말라야 트래킹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지도 까맣게 잊은 얼굴들이다. 산소 호흡기를 물고 장난치느라 최종 흡입량이 모자랐던 유진은 나의 눈총을 받으며 30분을 더 마셔야 했다.
아이들이란 고산병이든 산소 마시기 치료든 뭐든 다 놀이로 만들어낸다. 애태우는 입장에서는 야속하고 밉다가도, 그 대책 없는 낙관성이 부러워지는 것은 또 어쩔 수가 없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낼 때도 마찬가지다. 초등교사인 내가 너무 꼼꼼하게 준비하기보다 아이들을 믿고 내맡겨보면 일인 듯 놀이인 듯 어찌어찌 진행되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발랄함으로 나름의 꼴을 형성해간다.
미리 계산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지나간 일을 머리에 담아 후회하지도 않고, 그냥 현재 그 자체를 즐기는 그들만의 본능! 사실은 내가 길 위에서 여행자가 되어 배우고 싶고 배우고자 애쓰지만 잘 체득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라다크 레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