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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루리 Sep 14. 2022

방황하는 칼날(히가시노 게이고)을 읽고..

아내와 사별한 후, 삶의 의욕을 잃은 나가미네 시게키에게 유일한 희망은 딸 에마밖에 없습니다. 무신경한 듯 하나, 에마의 일거수 일투족이 신경쓰이는 전형적인 딸바보 아버지입니다. 마을축제가 있던 어느 날, 벌써 돌아왔어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귀가하지 않는 에마때문에 나가미네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대체 어디로 갔을까? 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걸까? 가까스로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녀의 행방을 찾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나가미네는 강물에 떠내려 온 에마의 시체를 마주하게 됩니다. 내 인생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딸아이의 죽음.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무력감이 이토록 절절하게 가슴을 에일 수가 없습니다. 범인은 누구일까? 왜 예쁘고 착한 우리 딸이 이런 모습으로 죽어야만 하는 걸까? 지금부터 딸아이의 복수를 위해 법의 허용치와 감정의 한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버지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됩니다. 

오늘의 소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적스릴러물 '방황하는 칼날'입니다. 여러번 영상화된 적이 있어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대중의 인지도가 상당히 높은 작품입니다. 그만큼 소설자체에 대한 완성도 역시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방황하는 칼날은 범인의 정체가 무엇일까 고민하고, 범행트릭을 파헤치는 본격추리물이 아닙니다. 애초에 범인과 피해자의 행적이 무엇인지, 사건은 어떻게 발생했으며 살해 동기는 무엇인지.. 그리고 경찰의 수사대상이 누구인지 낱낱이 드러나기에 독자들은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 책장을 넘겨야 할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반적인 작가적특성이기도 한데요. 의문의 여지없이 독자들에게 상황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인물설정과 작가특유의 흡인력있는 문체적특성이 한데 어우러져 그 이상 없을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사실, 이런 설정의 작품은 스릴러 영화나 범죄드라마에서도 흔히 보아온 방식입니다. 악인에게 무참히 해를 당한 주인공은 복수를 감행하고 악을 처단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 와중에 때로는 법의 허용치를 벗어나기도 하지만 독자와 관객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열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여타 비슷한 류의 작품들보다 특히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복수를 감행하려는 아버지의 시선과 이를 막아내려는 경찰의 시선, 그리고 그들의 눈을 피해 흔적을 지우려는 범죄자의 시선이 교차로 서술되어 극적긴장감을 조성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공범의 지위에 있는 누군가가 몰래 복수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설정이 시점의 간극에서 생기는 재미를 극대화합니다.(추리작가 아니랄까 봐 예상치 못한 반전까지 잊지 않습니다.) 선인일지라도 무작정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악인일지라도 순수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이입하고 하나하나 행동을 관찰해야 할 메인캐릭터는 역시 나가미네입니다. 딸의 억울한 죽음에 울부짖는 아버지의 처절한 심경에 어느새 동화되어 버립니다. 급기야 그의 범죄행각을 응원하게 되겠죠. 현실에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소설속의 세계라면 다릅니다.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법을 적용할 수 없는 나이라는 이유만으로 방관한다면 이보다 더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현실세계의 한계가 픽션의 세계에까지 확장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과는 달리 나는 몸소 실천할 수 없기에 내것마냥 소설속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여 힘을 북돋아 줍니다. 

반대로 경찰의 입장에서 본다면 또 얘기가 달라집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사적 복수의 영역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마음으로는 알지만 머리로는 거부해야 하는 씁쓸한 현실입니다.  

남에게 의지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 또한 인간의 몫입니다. 과연 무엇을 우선시 해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는 불보듯 뻔한 비극적 결말이 또 다른 희망을 안겨줄 누군가의 시선과 교차할 때 더 없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지금 이 곳이 아니라.. 다른 곳 다른 시간에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방황하는 칼날은 사건의 행방을 추리하는 재미보다 저마다의 처절한 심경을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중점을 둔 작품입니다. 시종일관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공고히 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고발하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 소설의 카피에서 말하는 사회의 부조리란 과연 무엇일까요?  '악'인줄 알면서도 그를 벌 할 수 없음이 사회의 부조리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부조리는 알면서도 벌할 수 없는 애꿎은 현실이 아니라, 어느덧 벌할 수 없음을 당연시 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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