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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루리 Sep 30. 2022

백광(렌조 미키히코)

치매를 앓고 있는 게이조에게 남아 있는 기억은 하나뿐이다. 젊은 시절, 징집이 되어 전쟁터로 떠나던 날 아내는 이유 없이 자신의 외도를 고했다. 내 딸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아이도 내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아내에 대한 증오심 때문일까? 게이조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딸아이와 똑 닮은 소녀를 무참히 살해하고 만다. 그렇게 평행선을 달리던 증오심과 죄의식이란 두 가지 감정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회한을 남겼다. 


사토코는 여동생 유키코가 맡겨놓은 그녀의 딸 나오코를 시아버지 게이조와 단둘이 남겨 둔 채 집을 비운다. 그런데.. 그 잠시 잠깐의 사이 나오코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사토코는 아무래도 연락이 되지 않는 유키코를 대신하여 매제 다케히코에게 나오코의 실종 소식을 알린다. 나오코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불길한 예감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나오코가 그들의 집 마당에서 충격적인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다. 과연 어린 소녀 나오코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인 걸까?


독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뛰어난 반전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소설, 역시나 소설 '백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상상 이상의 충격과 애잔한 심경에 사로잡혀 이 공허한 마음을 해소할 길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본 소설 속 인물들은 그 누구보다 불쌍하고 애처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4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 '나오코'를 무참히 살해한 범인이 누구일까를 추적하는 추리물의 그것을 견지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론 범행의 진실은 그들의 심경을 표현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서술 트릭의 장점을 표현하기 위해 소설은 각각의 인물 중심으로 시점이 교차되어 서술된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남의 눈에서 바라본 감정의 크기가 이토록 다를 수가 있을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 오해로 점철된 그들의 삶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수십 년 전 소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살아가는 치매노인 게이조, 남편의 외도를 경험하고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토코, 아내를 사랑하지만 결국 외도를 선택한 류스케, 언니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고자 욕망에 휩싸인 유키코. 그리고.. 아내의 외도를 알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는 다케히코까지.. 그들은 단 한 명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설령 그것을 알았다 한들 몸소 실천에 나설 생각은 전혀 없으니... 이 얼마나 슬프고 애처로운 일인가? 그들은 결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키코와의 육체적 관계를 갈망하는 대학생 '히라타' 만이 온전히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갈 뿐이니.. 어쩌면 그야말로 제일 행복했던 사람이 아닐런지.. 


거듭된 외도와 치정이라는 극의 소재 자체는 참 자극적인데 반해 그들의 마음속 깊은 내면은 파고들면 들수록 현실을 외면할 뿐이다. 알고도 모른 채, 보고도 못 본 채 외면하는 안타까움은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그 크기가 가중된다. 죄의식과 회개를 갈구하는 일본 추리물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생각해 본다면 소설은 한 치도 그 한계를 벗어나질 않는다. 그래서.. 소재 자체는 다를지언정 기본적인 방향성을 생각했을 때 나는 소설 '요리코를 위해' 가 겹쳐 보였다. 비단 타인뿐 아니라.. 본인의 감정까지도 속인 채 살아가는 그들의 감정을 교묘한 죄의식과 결부시키면 이토록 아프기만 하다. 


각기 다른 성격의 인물들이 등장하기에. 그들의 그릇된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 또한 천차만별이다. 어린 시절 가졌던 열등감에서 벗어나고자 남을 속이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이가 있는 반면, 알고도 못 본 체하며 다른 곳을 바라보는 누군가도 있다.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일까? 아니, 과연 누가 진정으로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그들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 옭아맨 탓인지 그들은 다른 이들의 감정까지 오도해 버리고 만다.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상반되는 특성의 인물들로 하여금 이토록 잘 표현해 내는 작품이 또 어디 있을까. 


자, 다시 첫 장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래서.. 나오코를 살해한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추리소설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해 소설은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도 범인이 게이조일지, 사토코일지, 아니면 다케히고, 류스케, 유키코 그들 모두일지 끝끝내 진실을 감춘 채 독자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사실, 마지막 장에 더 큰 충격에 휩싸였지만서도..) 그런데 정작 그들은 나오코를 살해한 진정한 범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며 스스로를 책망한다. 철저히 자신을 속이며 그릇된 인생을 살아왔으니 종국에 이르러 깨달은 그 감정이야말로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일지 모른다.


4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 나오코도 아는 감정을 정작 그들은 왜 알지 못한 것일까?

피해자라고 해서 모두가 선인이 아니듯 가해자라고 해서 악인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잠재적 살인마였던 그들의 삶에 비루함과 상반되는 애절함을 느끼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닌 척 살아가는 그들보다 지금 당장은 가진 게 없더라도 내가 원하는 바를 꿈꾸며 살아가는 스스로의 삶에 행복함을 느낀다. 결국 인간이란 본인의 감정에 충실한 채 살아가야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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