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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 Jun 01. 2024

어릴 때,

그러니까 정말 어릴 때 나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어릴 때, 그러니까 정말 어릴 때 나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사실 피아노가 너무 좋아서는 아니였고, 엄마가 피아노를 전공했고 음악을 좋아했어서 엄마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나의 꿈도 피아니스트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즈음 계속 배우던 피아노가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고, 그때부터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배우던 당시에는 바이올린을 크게 좋아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하루에 매일 한시간씩 꼬박꼬박 4년 정도 연습을 하고 꾸준히 새로운 곡을 연주했던 걸 보면 좋아한다는 감정을 떠나서 바이올린에게 애착, 미련, 관성 등의 요소들이 섞인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감정을 그때는 잘 몰랐었다. 어느 순간 배우기 시작했었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좋고 싫음을 떠나서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것을 그냥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잠시 살고 있던 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한국의 교육과정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맞지 않는 공부를 할 바에야 자퇴를 하거나, 그게 너무 극단적이라면 학교는 설렁설렁 다니고 대학 입시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수많은 한국의 다른 학생들처럼 대학 입시가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유치원 때부터 공부를 장려하는 사회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친구들이 모두 학원을 다니는 동네에서, 어떤 학원을 다녀야 나와 내 동생의 수학과 영어 점수가 더 잘 나올 수 있는지 고민하는 부모 밑에서 내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수학이 어렵게 느껴졌던 나를 자책하고, 학교에서 하교하고 난 후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나를 한심하게 여기고,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어 웹툰과 각종 불량식품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나를 스스로 너무나도 싫어했던 그 순간들이 모두 버티고 버티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바이올린도 빠르게 멀어졌다. 가끔씩 몇 년 만에 바이올린을 꺼내서 연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을 다해 연주하지 않은 채로 10년 넘게 케이스 안에 고이 넣어두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소리를 들을 최소한의 에너지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20살에 대입과 동시에 자취를 시작하고 지금의 나로 회복하기에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솔직히 많이 괴로웠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하지만, 10대와 20대 초반의 나는 하방이 없는 상태에서 괴로워했었다. 비가 하도 많이 와서 굳을 땅이 모두 사라지다시피 쓸어져 내려갔었다. 조각조각 난 나의 땅을 찾고, 모으고, 다시 세워서 굳히는 그 과정들에는 20대 절반의 시간이 걸렸었고, 그 과정에서 나에게 맞고 편안한 옷을 힘겹게 찾아 나갔다.

맞지 않는 옷을 지금까지 입으면서 상처를 받고 있다가, 나에게 맞는 옷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옷감에 찔리고, 옷을 벗으면서 괴로워하고, 새로운 옷을 찾아나서고, 그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결국 내가 문제인지 환경이 문제인지 사회가 문제인지 나 자신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과정들은 지금 돌아서 보면 모두 필요했던 과정들이었지만 나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지만, 어떤 최선들은 상처로 남아 회복에 시간이 걸린다. 나는 이제 내 감정과 직관을 이전보다 믿는다. 내 내면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회에서 던지는 메세지들보다 현명할 때도 있어서 진정으로 나를 위한 선택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바이올린을 다시 꺼내게 되었다. 생각보다 실력이 녹슬지 않음에 놀랐고, 감정을 실어서 연주를 할 때 나오는 소리가 예뻐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예술을 내 삶의 일부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 이전처럼 공허하거나 외로운 감정이 나와 친구처럼 함께하지 않는다.


그냥 나답게 편안하게 사는 것이 나에게는 나를 위한 최선이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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