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번에는 자연분만했니?” 셋째를 낳으니 엄마께서 물어보신다.
첫째 때는 급속분만으로 진통 때 보지도 못했는데, 둘째 낳을 때는 무통 주사를 맞고 진통 중에도 남편과 웃으며 수다 떠는 모습이 어색하셨던 듯싶다. 난 무통 천국을 누비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계속 나에게 지금껏 자연분만을 안 한 것처럼 얘기하신다. 무통 주사는 자연분만이 아니라며. “엄마가 생각하는 건 자연주의 출산이지, 자연분만이 아니에요.”라고 계속 설명해드려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굳이 설명하는 데 힘 빼고 싶지 않다. 어차피 설득이 잘 안 될 것을 안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으셔서, 본인이 생각한 대로가 아니면 좀처럼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친정엄마 맞아? 왜 딸이 출산의 고통을 모두 느끼길 바라시지?’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난 첫째, 둘째로 나의 임신과 출산은 끝인지 알았는데, 막 둘째 출산을 마친 회복실에서 엄마는 말씀하신다. “다음번엔 꼭 자연분만해 봐, 더 좋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한 번 더 쐐기를 박으신다. 역시나 설득은 실패한 듯하다. 그런데 다음번은 무슨 말?
엄마의 말이 실현이라도 된 듯, 나에겐 한 번 더 출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셋째가 찾아온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막혀있는 싱가포르 국경 때문에 나는 싱가포르에서의 출산으로 마음을 굳혔다. 코로나 시대에 복잡해진 과정 출국 입국 과정과 자가격리까지, 만삭의 임산부가 그리고 후에 신생아와 함께 홀로 해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더불어 싱가포르 입국 제한 때문에 아이들과 떨어져 언제 이산가족이 될지 몰랐다. 어느 날 첫째가 잠들기 전 울먹거리며 물었다. “엄마, 동생 태어나면 우리 이제 같이 못 사는 거야?” 아이 둘이 싸울 때, 엄마 힘들게 하면 엄마 혼자 한국 가서 동생 낳고 온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적잖이 충격받고 며칠 동안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도 아이들을 타지에 두고 비행기를 타기엔 내 마음이 강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싱가포르 출산을 결정한 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편안한 한국으로 가서 출산하고 싶었다. 신생아가 태어나기 전, 홀로 밤잠 한번 푹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마지막 36주까지 날짜를 계산해 다이어리에 표시해 놓으면서 한국 출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사실 출산 병원을 예약하는 것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뒤늦게 37주에 예약했다. 아마 35주 차에 역아탈출에 성공하지 못했으면, 한국행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아이들은 매일 밤 눈물바다로 지내고 있었을 수도.
점점 커가는 배는 무거워져 가고, 뛰어노는 아이 둘을 감당하며 임신 기간을 즐기기엔 무리가 있었다. 밖으로 뛰쳐나가 홀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하루에도 여러 번이었다. 특히 아이들 재우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은 나에게 곤욕이었다. 첫째는 팔베개를, 둘째는 팔꿈치를 만지작만지작, 만삭의 배와 함께 양팔이 자유롭지 못한 채 천장을 쳐다보며 아이 둘 재우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생각은 매일 밤 날 지치게 했다. 자다가도 여러 번 물 달라, 더워서 에어컨 켜달라, 팔베개해달라고 번갈아 가며 굳이 엄마만 깨우는 아이 둘은 나를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고, 아이 둘을 홀로 재우지 못하는, 밤에 아이들 요구사항을 듣지 못하고 편하게 잠들어 있는 남편에게 서운함만 가득 쌓여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나가고 있었다.
이번 셋째 임신과 출산은 오롯이 나와 남편의 몫이었다. 우리는 서로 한 팀이 되어 움직여야 했다. 매일 밤 남편의 배 마사지는 어떻게 해서든 역아 탈출 후 자연분만을 향한 일종의 노력이었다. 한 달 정도 매일 밤 마사지를 해준 덕분에, 베이비오일 양은 빠르게 줄어갔다. 기적적으로 아이는 36주를 며칠 남기고 돌아왔다. 우리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출산 임박이 가까운 38주부터는 재택근무를 하며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싱가포르 국경봉쇄로 부모님이 들어올 수 없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출산 당일 갖가지 경우의 수에 따라 아이들 유치원 픽업에 대한 계획도 세웠다. 출산 후 병원 있는 기간의 아이들 식단표와 어떻게 시간을 잘 보낼지도 무슨 작전 짜듯 논의했다. 출산하면서까지 영어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각종 상황에 쓸 출산 관련 영어를 공부하며,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출산과 진통에 대해 밤마다 공부했다. 첫째, 둘째를 자연분만으로 어렵지 않게 빠른 시간에 낳았고, 출산이 체질이라는 말까지 들었는데도, 셋째 출산이 가장 긴장되었다. 더불어 제일 열심히 공부했던 출산이었다. 셋째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덕분이었을까? 마지막 정기검진이 분만 준비로 이어졌고, 2시간 반 최단 시간 출산에 성공했다. 나에겐 오랜 시간의 진통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기에 나의 계획은 최대한 빨리 자연분만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무통분만하겠냐고 했을 때, “아니오, 괜찮아요.”라고 나도 모르게 답을 하는 나 자신을 보며 흠칫 놀랐다. 다들 엄마는 강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진통이 아프면 빨리 낳겠지.’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그리고 다음번엔 자연분만해 보라는 엄마의 말도 계속 머리를 맴돌았었다. 자연분만을 자연분만이라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다. ‘내가 못 할 거 같아?’ 하면서 말이다. 다행히 재빠르게 남편이 나의 도전과 결심을 제재해 주었기에, 난 무통분만을 할 수 있었다. 다만 하나만 요청했다, 무통은 최소한만 놔달라고. 결과적으로 무통 천국이긴 했지만, 진통이 오는 신호인 자궁수축을 알 수 있었고, 진통 와중 아이들의 유치원 픽업을 위한 택시 예약까지 하며, 남편과 함께 호흡과 힘주기를 병행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집에 도착한 것이 확인된 후, 맘 편히 셋째 분만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남편의 좌우충돌 아이 셋 육아가 시작되었다.
싱가포르로 터전을 옮긴 후, 코로나 시대가 찾아오며 싱가포르 국경이 닫히며, 엄마와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졌다. 비행기 6시간 반이면 충분히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가까울 줄만 알았던 싱가포르가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하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엄마의 경계선 안에서 그녀의 조언들만 듣고, 흘려듣기라도 하면 무한반복으로 받아들여질 때까지 듣다가, 지금은 자유로워진 기분이다. 서운하시겠지만 나 나름대로 남편과 합심하여 아이들을 양육하고, 내 삶을 간섭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개척해나갈 수 있음에 나름 행복을 느낀다. 물론 엄마의 희생과 완벽주의 안에 짜여진 틀, 그리고 그 안을 벗어나지 않고 올바로 살아가길 원하시는 것은 알고 이해한다. 그렇지만 내 아이들이 커서 독립을 하면 놓아주어야 하듯, 엄마도 나를 이제는 놓아주셔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가득하다. 나도 이젠 세아이 엄마인데.
셋째 출산 소식을 알리고 엄마의 질문을 사실 예상하긴 했었다. ‘설마 진짜 물어보진 않겠지? 내가 무통을 했는지 안 했는지 궁금하시진 않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무통이라는 단어를 처음에 쓰시진 않아서 못 알아듣는 척 했지만, 결국은 물어보셨다. “어떻게 이번에는 자연분만했니?” 대답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사전적 의미를 찾아드리고 싶다. “이번에는 이라뇨, 첫째, 둘째, 셋째 모두 제왕절개 아니라고요. 엄마, 저 자연분만 맞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