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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heur maman Jun 22. 2021

낯선 타지에서 살아남기

싱가포르 상륙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구름이 몰려온다. “우르릉 쾅” 하루에 한 번 스콜성 비가 천둥 번개와 함께 온다. 비 온 후 활짝 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이 쨍쨍 이다. 길바닥을 적셨던 비는 어느새 바짝 말랐다. 날씨는 항상 똑같다. 특별한 변화가 있는 날씨가 아니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감이 안 잡힌다. 같은 하루의 무한 반복 같은 느낌이다. 여기 오게 된 지 얼마 지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시간 흐름이 안 느껴지는 걸까? 나는 지금 벌써 2년째 싱가포르에 살고 있다.


내 생애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해외에서의 삶은 생각지도 못했고, 관심조차 없었다. 편리한 대한민국, 내 삶의 터전은 오직 한국이라고 생각했다. 아이 둘은 어린이집에 잘 다니고 있었고, 아이들과 잘 맞는 소아과도 찾았다. 우리 가족은 어느 정도 자리도 잡혔고, 안정된 삶을 지내고 있었다. 미래도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아이들이 유치원을 어디로 갈지, 초등학교는 어디로 보낼지도 미리 고민도 하고 있었다. 집 근처 시장엔 맛있는 콩나물과 두부도 있었고, 보쌈, 칼국수 단골집도 생겼다. 편하게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도 있었고, 아이들 동네 친구와 육아 동지들도 있었다. 비록 나는 아침 일찍 출근에 칼퇴근, 남편은 종종 야근, 아이 둘로 정신없기에 우리 부부의 대화 시간이 줄어들어 아쉬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평안한 가정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의 한마디 “우리 싱가포르에서 살 게 될 수도 있어.”

“뭐라고? 갑자기 어떻게?” 


우리는 1달 후 싱가포르로 오게 되었다. 정신없었던 정리와 이사 준비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디데이에 맞춰 모든 걸 끝내야 했다. 그리고 떠났다. 우연한 기회에 오게 된 싱가포르, ‘아이들이 잔병치레가 많으니, 어릴 때 공기 좋은 곳에서 잠시 살아도 좋지!’란 생각에 가기로 했다. 비행기 6시간 반이면 왔다 갔다를 할 수 있으니 한국도 자주 갈 수 있을 꺼라 생각했다. 정말 잠시 있을 꺼라 생각했는데 벌써 2년이 훌쩍. 잠깐의 이사인지 알았는데, 그게 이민이었을 줄이야.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싱가포르, 그렇지만 특별히 어색한 건 없었다. 단지 외국일 뿐 다 똑같았다. 아이들은 유치원을 다니면 되고, 나는 마트에서 장 봐서 요리하면 되고. 마트에는 새로운 야채들도 있었으나, 이내 내 입맛에 찾는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식당도 많았으나 대부분은 집에서 해 먹었고, 가끔 외식도 했다.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었다. 여기 오면서 직장을 그만두었고, 타국이라 아는 사람들이 한정적이었기에 외롭기는 했다. 반면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우리 가족의 시간이 많아져서 좋았다. 더불어 바이러스 여파로 락다운이 되며 우리 가족은 집에서 아이들과 어떻게 재밌게 보내야 할지를 생각했다. 진정한 워킹맘에서 전업맘으로의 전환이었다. 결론적으로 아주 만족하면서 낯선 곳에서 적응해서 살아나가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해외에 나오게 되면서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같이 헤쳐나가고 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특히 그동안 이용했던 친정찬스, 시댁찬스도 없었기에 모든 것은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고 헤쳐나가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부부는 전우애를 느끼면서 진정한 전투 육아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에는 아이가 응급실을 가야 할 때, 남편보다는 친정에 도움 요청을 했지만, 지금은 도움 요청할 창구가 유일하게 남편이라는 사실이 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의 야근 거의 없는 직장생활과 바이러스로 인한 재택근무 덕분인지 육아 참여가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분업하여 육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해외로 이사 오게 되면서 가장 고민이었던 것은 아이들의 언어였다. 교육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였다. 해외에 나온 이상, 영어를 쓰는 것에 잘 적응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아이의 의견에 따라 한국 유치원으로 정착하였다. 아이들의 정서적인 안정, 그리고 모국어를 씀으로 생기는 정체성도 중요했기에 외국어 욕심은 부리지 않는 거로. 편하게 한글을 써서 그런지 아이들은 교육에 있어서 스트레스받지 않고 해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영어, 중국어도 배우고 있다. 아이들은 중국어를 배우는데 엄마는 못 알아듣는 게 흠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건강이 이슈여서 근처 소아과도 찾고, 응급실도 정했다. 이미 다쳐서 여러 번 가서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다행인 건 이곳에 온 후부터 아이들의 그 많던 잔병이 없어진 것이다. 일주일에도 두세 번 병원을 집 드나 듯이 다녔는데 이제 병원 근처도 안 간다. 오기 전까지 중이염과 기침 때문에 두 달을 항생제를 달고 살았는데, 그 흔하던 콧물, 기침, 중이염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약간 아프다 해도 스스로 이겨내는 면역력 또한 생겼다. 아플까 봐 걱정하는 날이 거의 없어졌다. 아이들이 아픈 날, 약 먹는 날보단 뛰노는 날이 많아졌다. 육아에서 병원 방문이 빠지니 삶의 질이 쑥 올라갔다. 단지 이젠, 다치지만 않으면 되었다. 

건강한 나날이 계속되니 아이들이 바깥 놀이를 하는 것이 다양해졌다. 근처 놀이터나 공원들 그리고 수영장은 아이들이 다 섭렵하고 있다. 요즘 들어 자전거와 킥보드를 타며 땀 나게 놀고는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을 맛보는 여유까지 생겼다. 더불어 자연과 어울리는 생활이 가능해졌다. “도마뱀과 개미는 나의 친구”를 얘기하면서 채집통에 넣고 관찰하기도 한다. 가끔 도마뱀을 눈앞에 가져와서 화들짝 놀라게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길 가다가 그리고 공원에서는 엄청나게 큰 미니 코모도 도마뱀과도 자주 마주치며 인사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동물원에선 가까이에서 동물들을 체험할 수 있었고, 길에 다니는 공작새들도 쉽게 찾아본다. 친숙함이 늘어서 그런가? 이젠 각종 벌레로부터 엄마를 지켜 주는 센스까지 늘었다.


아이들도 나도 우리 가족 모두 싱가포르 생활에 정착하였다. 바이러스로 한국 가는 길이 막히고 싱가포르 국경이 막히면서 셋째를 여기서 출산하니 뭔가 더 익숙해진 느낌이다. 진통하며 영어를 쓰니 외국에 있는 느낌도 확 들었다. 여긴 싱가포르구나. 이제 아이들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어디로 보낼지도 고민하고 있고, 또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할지도 생각하고 있다. 예전에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터전에 발을 내리고 안정된 생활을 시작했다. 우연히 오게 된 이곳,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것은 맞는 말 같다. 나의 선택은 또 다른 나의 미래 그리고 우리 가족의 미래를 열어주었다. 온전한 우리 가족이 똘똘 뭉치는 계기도 되었다. 가끔은 힘들지만 행복하다. 어느 낯선 곳의 익숙한 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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