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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타조 증후군

도망치지 말고 달려보자

by 손여름 Jan 14. 2025

타조는 적이 나타나면 모래에 얼굴을 처박는다.

당장 자신의 눈앞에만 적이 보이지 않으면

안전하다고 믿는 것이다.


문제 앞에서 나는 자주 타조가 됐다.

현실을 제대로 보고, 해결책을 찾는 대신

시선을 회피하고,

괜찮을 거라고 되뇌는 쪽을 선택했다.      


MRI 검사가 코앞으로 닥쳤다.      


엄청난 양의 하혈을 하고, 산부인과에서 수술이 시급한

거대 근종 진단을 받은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다행히도 그 후 추가 하혈은 없었다.      


커피는 완전히 끊었고,

얼음이 든 음료도 최대한 멀리하고 있다.     

 

저녁 식사는 되도록 간소하게 하고,

밀가루, 튀긴 음식, 떡볶이, 야식 등을

멀리하려던 결심은

이번 달 생리 시작 전,

폭발한 식욕과 함께 대차게 실패하고 말았다.  


저녁에 한 시간 이상 걷자는 다짐도

폭설과 추위를 핑계삼아 못 지키고 있다.

    

그래도 지난주부터 자궁근종 크기를 줄여준다는

꾸지뽕 잎, 뿌리, 줄기를 사서,

한 시간 이상 달인 물을 매일 따뜻하게 마시고 있다.    

  

그게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이번 달 생리 주기가 기존 24일에서 28일로 바뀌었다.      


근종이 커지면서 그 압력 때문인지

주기가 24일로 바뀐 지 오래되었고,

그래서 어떤 달에는 생리를 두 번이나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진짜 오랜만에 다시 28일 주기로 돌아왔고 생리통도 줄었다.      


배를 보면, 크기를 여전한데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제법 담담하다고 생각했는데,

MRI 검사가 당장 다음 주로 닥치니 너무 두렵다.    

  

꼭 제대로 망친 시험 성적표를 받으러 가는 기분이다.      


게다가 그 시험이 일반 시험이 아닌,

내 인생이 걸린 수능 시험이라는 것과

이미 충분히 말아 먹었다는 것을 아는데,

그게 얼마나 제대로 죽을 쒔는지를

국. 영. 수. 사. 과 모든 과목의 점수를

담임 선생님 입을 통해 통보받으러 가는 기분이다.      


수능은 그래도 재수라는 역전의 기회가 있지만,

한번 망가진 건강은 돌이킬 수도 없다.    

  

어제는 점심을 일찍 먹고 회사 단골 문구점에 들렀다.

떨어진 휴지를 사고, 클립과 티슈도 샀다.


계산대에 올려놓으니, 어디선가 사장님이 나타난다.      


“점심도 안 드시고 오신 거예요?”

“아뇨. 일찍 먹고 들렀어요.”     


혼자 일하는 환경이라,

평소에 내가 점심을 챙겨 먹는지 아닌지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걱정을 담은 안부가 고마웠다.     

 

계산을 끝내고 나가려는데, 이번에는

“올해는 좋은 일만 있으시고 건강하세요.” 한다.      


항상 업무에 쫓겨 무표정한 얼굴로

물건만 사 가기 바빴는데,

오늘은 전에 없던 함박웃음을 짓고 만다.      


“감사합니다. 사장님도 건강하세요.”

하고 문구점을 나섰다.    

  

해가 바뀌고는 처음 들른 단골손님에게

으례껏 하는 새해 인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작년에 유난히 힘들었던 데다,

현재 건강 상태도 좋지 않은 나에게는

꼭 진심을 담은 ‘맞춤 응원’처럼 들린다.      


다음 주, 검사 결과가 너무나 두렵다.      


사실, 내 뱃속에 든 어마어마한 근종의 크기와

그 흉칙한 실체를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회피는 안 된다.

어떤 결과든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최대한 개복 수술이 아닌, 복강경으로 가능하기를,

자궁 적출만은 없기를 바라지만,

최악의 경우라도 받아들이자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적을 만난 타조가 모래에 고개를 처박는 대신,

긴 다리를 쭉쭉 뻗어 전력 질주하는 상상을 해본다.


다음 주, 나도 고개를 바짝 세우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과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것이다.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처참한 결과 앞에 담담하고 씩씩하기까지는

못하더라도,


또 조금 눈물을 쏟고 얼마간 울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것이다.


꿋꿋하게 다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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