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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4학년, 잼민이를 붙들고 고민 상담을 했다.

이것은 신의 계시이니라.... 

by 손여름 Mar 20. 2025

오늘 있었던 상황. 

 

회사에서 여비를 지원해 주는 사업이 있다. 팀원을 짜서, 타지역으로 답사를 가고 거기서 얻은 인사이트로 회사에 적용할 수 있는 정책을 짜는 목적이다. 다녀온 후 결과 보고를 제출하면, 그중 적용가능한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한 팀에게는 100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부상으로 준다.      


나와 같은 업무를 하는 선생님이 내게 먼저 함께 해보자고 제안을 했고, 목적지가 제주도였기에 나는 수락을 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오늘 카톡으로 전송해 준 참가신청서를 보고 나서야 팀원이 우리 둘이 아닌, ‘셋’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황당한데.... 나머지 한 명이 심지어 팀장님이었다!      


최종 멤버가 몇 명인지, 그 구성원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은 것에서 일차로 기분이 나빴다. 본인은 말했다고 생각했단다.      


다행히 우리 팀장님은 좋은 상사다. 팀장의 위치에 있으면서 권위를 부리지도 않고, 몸을 쓰는 힘든 일에도 직책을 내세우며 빼지 않고, 나서서 함께 해준다. 내 건강 문제를 알고 난 후에는 병원에 갈 때마다 전화해서 결과를 물어봐 주고, 아침마다 나를 위해 기도까지 하고 계신다. 말도 잘 통해서 같이 있으면 즐겁기까지 한, 귀여운 언니 같은 분으로, 밖에서 만났으면 편한 언니로 좋아하고 따랐을 것 같은 사람이다.      


최근 일하면서, 새롭게 만난 사람을 대할 때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꼰대력이 되살아나려고 하는 순간마다 팀장님의 쿨함을 떠올리며, 괜한 훈수나 가르침을 핑계 삼은 잔소리를 자제하자고 다짐 할 정도다. 그만큼 팀장님은 귀감이 되는 상사다. 

   

그러나, 팀장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별개로 1박 2일 제주도로 떠나는 팀 원정대의 멤버를 지원 신청 후에나 그것도 서류를 보고 알게 되었다는 것이 몹시 황당했다.       


상대는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왜 말하지 않았냐는 나의 물음에 카톡으로만 이야기하다 보니 서로 이해의 정도에 오해가 생겼나 보다며, 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을 시 전화로 이야기하겠단다.     

 

그리고 팀장님은 워낙 바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못 갈 가능성이 크니, 그때는 우리끼리 가면 되는 거 아니냐며 대화를 마무리한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던가? 


아... 화딱지가 난다.      


이것이야말로, 무심함을 빙자한 무례함이고, 인간관계의 기본을 지키지 않는 처사다. 


화가 나서, 지금이라도 나는 안 가겠다고 할까? 생각했다가도 멤버가 고작 세 명인데, 신청서까지 셋으로 접수한 마당에 이제 와서 못 가겠다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그러자고 군말 없이 가자니, 상대의 무례함에 여전히 화가 나고 처음부터 이렇게 삐걱대는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내내 더 큰 트러블이 있을까 우려된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별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싶은 생각까지 든다.   

   

나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편이다. 그 때문에 매사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어떤 일은 필요 이상으로 크게 부풀리기도 한다. 


그것을 알기에 이번 일도, 그냥 넘어갈까 하는 마음이 드는데, 자꾸만 찜찜하다.     

 

이럴 때, 지혜로운 사람에게 물어보면, 좋을 텐데...     


핸드폰을 들어보지만...... 마땅히 전화할 사람이 없다.   

   

한번 전화를 하면 핸드폰이 뜨거워지도록 몇 시간이고 통화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여럿이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들을 가족과 다름없는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그중 그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어서 하소연할 수 없게 됐다.      


사람에 대한 회의감이 가까운 친구들과 관계가 어긋나면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지금은 모든 게 모호하지만, 나는 점점 친구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것이 친구뿐 아니라 다른 가까운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작은 섭섭함이 쌓이고 쌓여, 돌처럼 굳어졌고 대화로 풀고 말고 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나는 서서히 사람들에게 멀어졌다.      


문제는 뭐든 중간이 없는 나라는 사람은, 가까운 한 명과 그런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리면 그 회의감이 주변 대다수에게도 다다른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게 더 심해져서, 그나마 의지하고 있던 관계도 끊어졌다.      


내가 준 마음만큼, 그 반이라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서럽기까지 했기에 나는 또 돌아섰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물어보고 내 감정이 너무 지나친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하는게 현명한 반응인지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다. 


친언니가 잠깐 생각 났지만, 그녀는 그야말로 대문자 T다.      


핀잔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어찌나 답답했던지,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올해 4학년이 된 쌍둥이 조카 중, 내가 사랑하고 사랑하는 여자 조카였다.      


평소 제법 조숙한 조카는 나보다 더 나은 해결책을 내놓을 때가 종종 있었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조카에게 처음 하는 고민 상담이라, 제법 긴장되기까지 했다.      


“무슨 소리야? 당근 가야지!”     


너무 화가 나서, 지금이라도 이 프로젝트에서 빠지겠다는 내 말에 대한 조카의 답변이다. 

    

“응? 그래도 그렇게 중요한 것을 말도 안 하고, 혼자 멋대로 멤버를 구성한 게 너무 기분 상한데...?”     


그랬더니, 상금이 100만 원이고, 여행비도 다 대주고, 거기다 제주도인데 당연히 가야지 무슨 소리냐고 한다.      

“그래도 기분이 너무 나쁘단 말이야.”

“기분보다 상금이 중요하지! 그냥 무시하고 갖다 와!”    

 

음... 정말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다. 


영양가라고는 전혀 없는, 기분보다 상금이라니... 


아.... 조카 또한 대문자 T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는 것을 내가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구나...      


“제주도니까, 내 선물도 꼭 사 오고!”     


참으로 명쾌하고, 지극히 가볍다.      


비슷한 F들만 가득했던, 내 인간관계.... 


그 어떤 친구에게서도 듣지 못할 답변이었다.     

 

가장 먼저 공감을 바랐을 텐데... 우리 조카는 공감 따위 1도 생각이 없다.      


뭔가 찜찜한 마음에, 나는 썩은 동앗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자 쌍둥이를 바꿔 달라고 했다.      


남자 조카는 평소 자존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다 섬세하기까지 해서 조금이라도 공감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냥, 그 사람 무시하고 갖다 와! 상금 탈 자신 있다면서!”     


오잉? 


한날한시에, 한 뱃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외향부터 성격까지 죄다 반대인 두 아이...

이 녀석들이 쌍둥이가.... 맞긴, 맞구나!    

  

포인트는 달랐지만,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둘에게는 감정이고, 시시비비고, 사과고 자존심이고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지원해 주는 돈으로 여행도 다녀오고, 상금도 타는 게 진짜 중요하다는 거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답답하다고 한들 잼민인들에게 그럴싸한 해결책을 기대하다니...      


휴우, 한숨을 겨우 삼키고 일단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대한 공감 따위 1도 받지 못했고, 내가 중요시하는 부분은 깡그리 무시한 답변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평생을 감정과 매너와 옳고 그름에 집착하는 삶을 살았기에, 정확히 그 반대 지점만을 따지는 초등학교 4학년 잼민이들의 답변이 신선했다.     

 

그래, 뭣이 중한디....     


일단 내가 어떤 지점에서 기분이 상했는지, 언질을 했으니 상대도 알았을 것이고, 또 이것이 오히려 좋은 지점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남아와 여아의 공통되는 해답을 하늘의 계시로 여기기로 했다.      


일단, 불편한 마음과 더 불편한 논쟁은 접어두고, 추가 계획서를 마저 작성하고 기다려 보기로 한다.      

그 여행의 후기는 또 브런치에 올리겠다.      


추신.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제가 너무 예민했던 것인지,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는지... 또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응 하셨을지... 댓글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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