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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Feb 08. 2023

Vol.16<유리한 비망록>

[기록보관소]

사서 김세은입니다. 

창문 밖의 풍경에 매료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거예요. 우린 유리를 통해 유리 너머의 세상을 관찰하고, 유리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나와 유리 사이, 그 작은 공간에서의 고요함은 어제의 삶을 고민하게 하고 깨달음의 감정을 전달합니다.


유리를 통해 돌아본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 그 속에서 발견한 해방을 담은 에세이 <유리한 비망록>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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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듯 올라탄 야간열차. 차창에 비스듬히 비친 달빛에 왼쪽 볼을 기댄 주인공이 입술을 달싹인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지 않으리라.' 우리는 투명한 유리에 맺힌 상과 반사광에 마음을 일깨운다. 그 형태를 지그시 관찰하며 어제의 삶을 고민한다. 과거의 속박에 추를 달아 바다에 던지고, 낡은 구속구를 탈출해 가치를 재정립한다. 그리하여 때아닌 굳은 다짐과 자유가 여실한 도움 닫기를 시작한다. 난 유리에서 해방을 본다. 응당 우리가 만끽해야 할 해방 말이다.

연습생

어떤 사람이 가진 어떤 류의 과거를 올곧이 마주하면 형용할 수 없는 저릿함을 느낀다. 그럴 때 나는 스노우 글로브를 왕창 흔든다. 둥근 유리 안에서 글리터가 어지러이 흩뿌려진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담아낸 장면 위로 그것들이 안착하면 묘한 안정감을 느낀다. 마치 내가 누군가의 미성숙했던 시간을 껴안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디지털로 각인된 너의 어려던 순간들을 매만진다. 대개는 뭉클함을 자아내곤 끝이 난다. 그러면 어제 농담을 했던 네가 달라 보인다. 귀 끝이 모조리 벌게지도록 웃어대고, 코를 먹어가며 턱을 가만히 못 두는 얼굴이 이전보다 더 실감 난다.


이어폰 끼고 찬송가를 부르던 애는 방학 때면 타국을 찾았다. 모든 게 처음이었겠지. 또래들의 유년을 건 경쟁심리 혹은 유년을 바쳐 함께했던 공동체 의식 아니면 그 둘 다. 9년을 기다리며 넌 어땠어? 인내를 배웠을까? 번번이 문턱을 넘지 못했을 때는? 잠은 잘 잤고? 나는 유리구 안의 너에게 존경을 느껴. 성의 없는 캡션 뒤로 앳된 티가 그득 묻은 얼굴을 내비치고, 이따금 시답잖은 말 하더라. 눈물을 닦고 웃기도 많이 웃고. 옥상에서 춤추고 대리석 바닥에 머리 대고 막 구르고. 사람 좋은 건 여전하고.


이다지 자라나 소년에서 해방된 너는 네가 곧잘 찍는 사진들처럼 생동하는 빛을 품고 있네. 한낮의 소나기가 콘크리트 위로 한두 방울 떨어질 때 같은 연음이, 애정을 못 참고 잇새로 픽픽 뿜어내는 어투가 그 시절의 널 빼곡히 증언한다. 얼럴뚱땅 한복을 소개하고, 포스트잇에 적힌 삐쭌 활자를 읽고, 팔다리 쫙쫙 뻗어가며 땀 흘리던 오래전의 캠코더, 디카, 일회용 필름 카메라 속 너야. 수고했다.

초년생

홈바에서 병을 꺼내 물을 따른다. 갑작스러운 온도 차에 유리컵의 음각을 따라 물방울이 맺힌다. 그리고는 유유히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 꼴이 꼭 힘없는 우리네 인생 같은 건 왤까. 또 시작된 하루가 정말이지 못 견디게 의미 없다. 사실 어른이라 명명하는 나이가 되고 매일 그런 편이다. 메신저 확인하기 싫다. 말하기 싫다. 그 얼굴 보기 싫다. 일하기 싫다. 요즘엔 전화받는 것도 싫다. 크면 뭐든지 의연해진다나. 아니, 난 어릴 때보다 더 투정 부리고있다. 생과 죽음 사이의 필연적인 선택조차 스킵하고만 싶다. 비단 그게 나뿐인가? 내 주변 어른들 모두 그렇다. 그러니까 다들 뭘 해보기도 전에 이 사회의 만연한 피로에 탄압된 것이다.


차라리 회까닥 돌아 정신 나간 해맑음으로 무장할까? 노력도 재능임을 뭉근한 속도로 깨닫게 되자, 실없는 생각만 든다. 술렁이는 회의실이나 지하철을 담은 듯, 반동에 따라 율동하는 투명한 잔의 액체를 개수대에 붓는다. 이건 이렇게 놓아줄 수라도 있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다. 원래 자의보다 타의에 의한 해방이 상황에 따라서는 더 유용한 법이다. 누구든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기에. 나중에 가서는 유리 조각처럼 작은 해방도 내 결점으로 치환된다. 그 작은 놈이 예리한 날을 세워 치명적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왜 이 세계는 전가를 당연하게 휘두르는지. 내 마땅한 자유는 내가 저지른 잘못이 아닌데.


냉동실에 잠시 넣어뒀던 술을 꺼낸다. 글라스의 결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골똘히 무언갈 고민하는 척한다. 나는 아무 생각 없다. 사실 걱정거리는 많은데, 떠올리기엔 너무 과다해 그냥 없는 듯 둔다. 누가 말 걸면 마냥 친절해 보여야지. 제삼자에게 내 신경질까지 냅다 토스하고 싶진 않다. 그게 나의 최후의 매너다. 꽤 있던 술이 점점 줄어간다. 글라스만 또렷이 바라보다 눈을 감았더니, 그 빛과 잔상이 찌르르 아른거린다. 영문 모르고 갇혔던 것들이 모조리 내 입안을 거쳐 식도를 타고 흘러간다. 그래, 이게 너희에게 선사하는 해방이야. 근사하지.

준비생

선회하는 별이 잠든 우리 머리맡에 멈춰 선다. 악몽을 거르고 좋은 꿈을 가져온다는 드림캐처가 옅은 진동에 살랑인다. 우리 몸이 우주의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별의 잔해를 가슴속에 덤덤히 간직하고 사는 이들. 우린 별의 편린을 갖고 태어났기에 찬연히 빛을 발하는 태양과도 같다. 썬캐처의 크리스탈 유리는 작은 태양 조각처럼 체인을 타고 흐른다. 그 촘촘한 빛이 대기를 유영한다. 밤에는 눈을 감고 꾸는 꿈이 있듯, 낮에는 눈을 뜨고 꾸는 꿈이 있다.


되고 싶은 게 없는 건 절망적인 걸까. 꿈을 일차원적으로만 가르쳤던 교육 사조가 퍽 원망스럽다. 현상 유지만 하기도 벅찬데, 무늬 좋은 거대한 꿈은 주제넘은 것 같다. 그에 걸맞은 배경도, 준비도 하나 없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꿈들은 빛의 기세가 없는 밤으로 숨어든다. 난 적당량의 중력이 필요한데, 이를 충족할 수 없는 우주에 갇힌 기분이다. 그때마다 태양은 언제든 나의 어둑한 천체 위로 떠오른다. 그늘졌던 창문가에 내리쬐는 풍광이 재생되면, 썬캐처는 어김없이 빛을 산란한다. 나의 수만 가지 꿈이 해방되는 순간이다.


나와 우리의 꿈들을 나열해본다. 수많은 말이 오가는 인생사를 부여잡고 연연하지 않길 바라며. 모든 의문을 뒤로하고 그저 오래도록 묵묵히 걷길 바라며. 연이어 만남을 갖고 떠나는 사람들을 눈에 담아야 하는 자질구레한 순간에도, 붙들고 놓지 못할 사건이 흉통 위로 스며드는 기로에도 단단하길 바라며. 그렇지 못한다면 유연하길 바라며. 예전 날의 자신을 다시 대해도 탓하지 않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너는 견줄 데 없이 빛난다는 걸 잊지 않길 바라며.

작가의 마지막 유작과 18인치 떨어져 있던 관람자의 어깨가 들썩인다. 액자에 눈물 흘리는 그의 초상이 유화와 겹쳐진다. 그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얼굴은 붓 터치를 따라 재연된 작가의 심정을 읽었다. 종내에는 자신의 슬픔이 그에 전이돼 울컥했다. 은근한 조명이 비친 액자 유리에는 그 감정과 매무새가 여과 없이 투영됐을 거고, 속에서 곱씹고 반추하던 응어리들이 눈물로 해방된 것이다.


그의 울대가 일렁인다. 세상을 열망하는 총명한 두 눈에 생기가 어린다. 어쩌면 해방으로 얻은 자유가 현실에 부딪혀 깨어질 물리적 특성을 지닌다 해도, 그 유리 조각에 스쳐 상처난다 해도. 우린 그에 가닿는 걸 멈추지 않겠지. 어리석은 게 아니라 용감하기 때문에.


이만 줄이며, 당신들의 유리에도 푸른 자유가 깃들길.


Vol.16 <유리한 비망록> 中

Editor 함유진

Photographer 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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