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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럭저럭 소소 Nov 04. 2020

사이코지만 괜찮아

<별에서 온 그대> 이후, 김수현의 복귀작이란다. 요즘 <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 얘기다. 김수현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여배우의 비현실적인 허리둘레를 놀라워하며 보고 있는 중인데, 작중 인물은 어린 시절 미친! 성장배경으로 인해 지나칠 정도의 방어본능을 장착하고 있는, 사이코 동화작가이다. 김수현은 그런 그녀와 어린 시절부터 얽혀있는, 그도 자폐증 형을 지순한 도덕으로 떠메고 사막을 걷는 낙타다. 둘 다 자기 안의 상처로 너덜너덜한 인간인데, 한쪽은 인간의 온기를 거부하는 쪽으로 발달하고 다른 한쪽은 인간의 온기에 절어 있다는 점이 달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온기 결핍, 혹은 과다는 어딘가 불균형해 보인다. 그러게 같은 억압 아래서도 다르게 생산한다. 무슨 말인고? 술주정하고 식구들 패는 인간 말종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자매가 있다 치자. 두 자매는 그 폭력을 내면화하는 방식이 다르다. 한쪽은 폭력에 굴종하고 자신을 거기다 맞춘다. 한쪽은 폭력에 저항하고 자신의 길을 간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다룬 테마 중 하나다. 무엇이 같은 환경 하의 개체를 다르도록 만들까.

사이코지만 괜찮아로 다시 돌아온다. 이 드라마가 액세서리 주렁주렁한 잡화전 같이 여러 취향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인지, 예쁘고 멋있고 신파적이고 신비의 탈을 쓴 정신분석과 썸 타는 남녀관계와 사랑과 우정 사이의 이상한 남자끼리 관계도 약간 집어넣고... 이 드라마는 대체 어디가 중심인가? 중심이랄 게 없는 중심,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호를 표방하는 건가? 아무튼 나도 별 중심 없이 밥 먹으며 보다가 7편이던가, 눈길을 끄는 장면을 발견했다.

괜찮아 병원에 입원한 중년 여자 환자는 명품 밍크 숄을 여름에도 애지중지 두르고 다닌다. 오, 상류층 마나님이 재산 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다 끝내 미친 거구나, 짐승 같은 가족들은 그녀를 거기다 유폐시켰겠지. 오해했다. 알고 보니 남편 없이 딸을 키우던 그녀는 식당일을 하며 근근이 살았다. 어느 날 취직한 딸이 엄마 준다고 큰 맘먹고 명품 숄을 사 온다. 가격표를 보고는 우리 형편에 가당키나 한 물건이냐고 딸에게 모진 말을 했고, 딸은 이런 엄마가 넌더리 난다며 숄을 갖고 뛰쳐나간다. 그 길에 교통사고, 딸은 즉사하고 명품 숄이 남았다. 여자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워 자기 속에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낸다. 딸은 아직도 저 어딘가에서 잘 나가고 있으며 바빠서 엄마를 찾지 못하고 있고 곧 그녀를 만나러 올 거라 믿는다. 그게 그녀의 현실이다.

우리의 여주인공을 딸로 착각한 여자는 그녀를 붙잡고 잘생긴 보호사(김수현 분)가 너의 이상형이니 사귀어보라며 쫒아온다. 동화작가는 그런 그녀의 치근덕댐이 귀찮다. 온기라고는 없는 그녀는 냉정하게 당신 딸은 죽었다며 비수를 꽂는다. 기절했다 깨어난 여자, 그녀는 여전히 숄을 두르고 있다. 여자는 이제 벌거벗긴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동화작가를 만난 여자는 사과한다. 그동안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고. 여주인공의 대응이 재미있다. 당신 때문에 이 병원에서 동화 수업을 하던 일에서 잘렸으니 당신이 보상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눈이 동그래진 여자, 뭘로 보상해야 하나요? 당신이 두른 그 숄을 달라며 그 숄을 뺏는다. 옆에서 보던 보호사 김수현은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몸짓 잠깐. 숄을 두르고 표표히 떠나는 여주인공. 잠시 후 여자는 말한다. "이제 어깨가 좀 가벼워진 것 같네요."

니체는 ‘죄 Schuld’라는 도덕 개념은 ‘부채 Schulden’라는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있다,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빚을 갚으면 그 관계에서 풀려난다. 그런데 사는 게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닌지라 채무자는 그 빚을 채권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갚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 법이라든지 정의라는 것은 채권자 즉 강자가 약자를 배려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뭔 말? 니체가 말하는 강자를 요즘 갑질 해대는 특권층 이런 개념으로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니체가 말하는 강자는, 일단 매사 남 탓하는 지질한 인간은 아니다. 그는 자기 목적에 충실하며 남의눈을 의식하며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해방된 인간이다. 세속 도덕에 목줄이 매여 자기 욕망을 억누르며 착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은 인간과는 반대편이다. 이런 인간은 세속의 잣대로 보면 좀 싹수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샘플을 들라면, 음,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 드라마 이태원 클래스의 박새로이(생각해볼 여지가 약간 있긴 하다. 어찌 보면 이 인물은 신자유주의의 자기 계발의 끝판왕 같아 보이기도 한다. 돈에 반응해 돈만 쫓아가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은 사실 약자다. 박새로이가 그런 건 아니지만 돈으로 성공한 인간은 돈에 익사하는 수가 있다) 같은 인간형이라고 보면 될까? 그래, 법이나 정의는 약자들이 뭉쳐서 강자의 횡포를 척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처음에는 약자들이 그 빚으로 인한 무게 때문에 더 나빠질까 봐, 즉 죄책감이라는 더러운 심연으로 빠질까 봐 만들어 놓은,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빠지려고 할 때 한 대 맞거나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으면 새 인간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가 '너는 본래 그런 인간'이라고 구라를 쳐놓으면 우리는 물질적인 부채감을 정신적인 죄로 변형시키게 된다. 정신적인 죄는 갚을 길이 막연하다. 결국 '내 탓'을 죽을 때까지 해대며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우리의 여자 주인공은 그 여자를 죄책감의 심연에서 간단히 끌어올렸다. 너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딸에게 모진 소리를 한 것은 그때 그럴만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너는 무지해서 그랬던 것이고 그 무지가 죄는 아니다. 숄은 딸 죽인 에미가 짊어진 십자가였다. 그 십자가를 벗겨주는 여주인공. 숄로 갚았으니 너는 이제 풀려났다!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는데(요즘은 가능하다 일회용 면도기로) 우리의 여주인공, 자기 상처는 스스로 어떻게 못하면서 남의 상처에는 밝다. 그러게 우리는 타인이라는 거울이 필요하다.

부처님 당시에도 아들 잃은 여자가 부처님을 찾아와 고통을 호소했을 때 부처님은 그 여자를 위로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그 여자에게 이 길로 마을에 내려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아 겨자씨를 얻어오면 너의 고통을 해결해 주겠다고 하셨다. 여자는 집집이 찾아갔지만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드는 깨달음. 생로병사는 다반사.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특정한 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특정한 불행이 생긴다. 불행이랄 게 원래 없는 것이라는 걸 여자는 깨닫는다. 부처님께서는 그저 미소만~~^^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게 있다면 스스로 깨달을 능력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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