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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비 Nov 12. 2024

커피를 내리다가

Comfort Zone

아침에 일어나 주방으로 내려오면 맨 먼저 커피를 내린다. 언제나 제자리에 있는 커피빈과 그라인더, 커피 필터를 꺼내 커피빈을 갈고 물까지 정확하게 맞추고 나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기억도 안 날만큼 오랜 시간 매일 아침마다 하는 동작이라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필요한 동작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다.


나이가 들고 살림 년수가 쌓이다 보니 점점 행동이 간결해진다. 오랜 시간 같은 부엌에서 손에 익은 연륜이 주는 효율성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슬며시 걱정이 된다. 내 나이만큼 쌓아온 동작들이니 당연히 편하겠지만, 이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닐 수도 있는데 내 나름대로 오랫동안 검증과 시행착오를 거쳐 내재화된 동작들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여겨지는 고집과 편협함도 같이 생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작게는 커피 내리는 동작부터 부엌일조차 이러할진대 인생은 오죽할까 싶다. 마치 내가 살아온 인생만이 정답인 것처럼, 온갖 구비를 넘어 이만큼 살아왔으니 이 길만이 맞는 길인처럼 여겨지는 마음. 모든 것이 적당히 깔끔하고 고요하고 정돈된 현 상태라 편하기도 하고,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도, 간섭받고 싶지도, 힘을 굳이 쏟는 일은 애초에 만들고 싶지도 않은 이른바 Comfort Zone에 머물러 있다.


이국만리에서 온갖 일을 정신없이 해대며 아이들을 키우던 젊은 날들은 어쩔 수 없이 부대끼고, 아쉬운 소리를 하고, 깎이는 아픔에 비명을 지르며 뚫고 지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힘든 부대낌 덕분에 그때는 유연하고 반응하며 웃고 울던, 삶과 사람에 대한 겸손과 수용이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정돈되고 평안한 상태로 접어들어 웬만한 일에는 반응도 하지 않을 만한 굳은살이 배이고 아쉬울 것도 없다 보니 삶에 대한 교만과 게으름이 스멀스멀 온몸을 감싼다. 주변에 나이 들면서 답답하게 느껴지는 분들이 종종 있다. 각자 힘든 시간을 지나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들면 마침내 살아낸 인생에 대한 자긍심 때문일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안도감과 뿌듯함이 교만과 과시와 아집으로 굳어져 점점 좁아지고 무례하고 단절되는 모습을 보인다.


나 또한 긴 시간을 거쳐 이제야 틀을 잡아가는 나의 성이 너무 좋은데, 이러다가는 아무도 오지도 가지도 않는 철옹성을 쌓으며 살게 될까 두렵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시간은 가고 세월이 가는 오십 대 후반의 고민. 결국은 균형일진대 그 균형 잡기가 외줄 타기처럼 어렵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면, 팽팽히 긴장하지 않으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넘어지기 십상이다. 인생은 언. 제. 나.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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