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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비 Apr 09. 2024

초록 집사

너의 마음으로

집에 어쩌다 보니 화초가 제법 많다.

남편이 결혼 전부터 갖고 있던 화분부터 시작해서 살면서 하나둘씩 생긴 것들이 자라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Green Thumb이라고 불리는 나는 미국 오기 전까지는 내가 식물을 잘 키우는 줄도, 식물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한국 아파트처럼 베란다가 따로 없지만, 그래도 미국 시골의 햇빛 좋은 집이다 보니 적당한 자리에 적당히 물 주면 대부분 대견하게 잘 자랐다. 그러다 보니 20년이 훌쩍 넘은 것도 있고 10년 차 이상도 제법 된다. 가끔 아주 작은 식물이 앙징맞아 사 오면 결국 사춘기 아이처럼 마구 제 맘대로 뻗쳐 올라 분갈이를 몇 번 해줘야 할 정도로 커진 것도 있고, 영 비실거려 밖에 내쳐 놓았던 화초가 무성하게 살아나 나를 부끄럽게 한 것도 있고.


아무튼 다른 집에 놀러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식물이고.

또 우리 집에 손님이 온다고 하면 제일 먼저 잎을 닦고 자리를 재배치하는 게 식물이기도 하다.

그런 걸 보면 화초를 좋아하는 게 맞는데,

또 그렇다고 매일 애지중지하지는 않는다.

다들 식물이 많으니,

엄청 정성을 기울인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정도 무심함에 가끔 세심할 뿐이다.

어느 날, 집에 손님이 오게 되어 화분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청소하는데 아이들이 물었다.

"엄마는 왜 매번 누가 오면 화분을 옮겨요?"

"응, 집 인테리어에 맞도록 예쁘게 화분들을 배치하고 싶은데, 얘들도 생명이라 너희들이랑 비슷해. 꼭 너희들처럼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되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리에 있어야 잘 자라. 평소에는 지들 좋아하는 대로 두다가, 이렇게 손님이 오는 날 하루만큼은 엄마 놓고 싶은 자리에 두는 거야. 옮길 때 속으로 얘기해. 하루만 참아 달라고. 엄마 면(面) 좀 세워 달라고."

아이들은 엄마의 대답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식물을 잘 키우는 건 사실 특별한 노하우가 없는 것 같다. 관점만 바꾸면 되지 않을까.

내 관점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보는 것.

내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자리에 놔주고,

원하는 빛과 물 주기가 다른 각각의 고유성을 살피며,

무엇보다

과도한 애정의 물 주기로 뿌리를 썩게 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살아있는 너희의 힘을 믿고 흙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적당한 무심함.

물론, 이 모든 걸 다해도 제대로 뭔가 맞지 않아 죽는 경우도 있음을 인정하는 생명에 대한 겸허함.


결국 너희를 살리고 자라게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축복의 햇빛과 흙과 생명의 물이니까.

나는 너희의 시중을 드는 초록 집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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