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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Oct 09. 2021

내 집은 내 보폭보다 좁다

Day 13

집 한 채가 하루 새에 사라졌다. 종종 있는 일이다. 아마 아홉 살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집에서 십 분쯤 걸어가면 나오는 큰 길가에 있던 학원이었다. 매일 악보집을 들고 걸어가던 길이 떠오른다. 처음으로 엄마 손 없이 걸은 남의 동네였다. 주변에는 낯선 집들이 많았다. 분식집과 오락실도 있었다. 종종 나는 학원에 가지 않고 떡볶이를 먹거나 남의 게임 구경을 했다. 길쭉한 슬러시컵에 담아주는 떡볶이의 온기가 생생하다. 오락실 아저씨가 날 쫓아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건 없던 기억일 수도 있다. 나는 용돈이 따로 없었고 오락실에서는 구경만 하다가 집에 왔다. 어린 나이에도 괜히 눈치가 보였던 것 같다. 아저씨와 눈이 마주칠 때면 서둘러 오락실을 나섰다.


무너뜨린 집은 피아노 학원과 붙어있었다. 딱히 특별한 게 없는 건물이었다. 여전히 집이 부서진 자리의 폐허는 생생하다. 그렇지만 부수기 전의 모습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삼층 정도 되는 빌라가 아니었을까. 어렴풋이 주변을 떠올리면 거긴 주택가였다. 철거는 갑작스러웠다. 어느 날 피아노 학원이 있던 건물의 가려져 않던 한쪽 벽면이 보였다. 빈 공터에는 짙은 색의 흙구덩이가 깊었고 주변에는 커다란 콘크리트 조각들과 철근이 지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노란색 테이프 때문에 폐허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접근금지 정도의 단어가 적힌 공사장 테이프였던 것 같다. 길을 오고 갈 때마다 나는 폐허의 깊은 자리를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집이 무너지는 건 찰나였지만 그 자리에는 오래도록 새 집이 세워지지 않았다.


희한하게 빈 터는 너무 작고 왜소해보였다. 저 조그만 터에 방이 있고 부엌이 있고 거실이 있었다는 게 이상했다. 그 후로도 집을 부수고 난 빈터를 볼 때면 늘 같은 생각이었다. 저렇게 좁은 땅이었나. 자연스레 나는 우리 집을 떠올렸다. 내가 자는 방은 얼마나될까. 종종 우리 집이 부서지고 그 아래 있던 땅이 드러나는 상상을 했다. 좁고 초라한 흙더미가 보였다. 나는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할머니, 고모, 삼촌과 함께 살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 집에 살았는지 참 모를 일이다.


애인과 함께 살 집을 구할 때는 늘 불안했다. 뉴스에는 집값이 올랐다는 소식과 지속적인 상승 추세라는 예측이 계속됐다. 애인과 나는 은행을 돌아다니며 대출 상품을 알아봤다. 정확히 얼마를 빌려줄 수 있다고 말해주는 은행원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하지만 야속할 뿐이었다. 문득 나는 가난한 부부라는 말이 부러웠다. 애당초 함께 살 집이 있다는 것이 대단했다. 우리는 전세를 알아볼 동네를 정하기로 했다. 몇 군데의 후보지가 추려졌다. 모두 집값이 저렴한 동네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첫 시작이 포기나 타협 같은 감정으로 물들지 않도록 노력했다. 누군가 부러워할 집에 살고 싶었다.


이윽고 공인중개사를 따라 집을 보러 다녔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는 늘 겁부터 났다. 문 너머의 집이 우리의 현주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공인중개사는 사람마다 태도가 달랐다. 적어도 우리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중년의 여성 공인중개사들이 친절했다. 남성들은 태도가 건성으로 느껴졌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거리낌 없이 여는 모습이 너무 사무적이었다. 빈집에는 모두 신발을 신고 들어갔다. 나는 남의 방에 흙은 남기고 오는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대부분의 집은 오래되고 초라한 곳이었다. 우리가 모은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넉넉치 않았다. 어느 곳은 반지하였고 또 어느 곳은 원룸이었다. 어떤 공인중개사는 위로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첫 시작으로는 나쁜 집이 아니라며. 요새는 전세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가 보고 온 어느 원룸에는 신혼부부가 사는 중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집은 어떤 공간이었을까. 아직 사람이 사는 집을 다녀올 때에는 조심해야한다. 혹시라도 누군가의 삶을 판단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매번 양가감정에 시달린 것도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내 마음 속에는 결코 살 수 없는 집의 기준이 견고했다. 이제 와서 보니 부끄러운 생각들이다. 늘 집보다 사람이 크기 때문이다. 집보다 작은 사람이란 없다. 집에 가려지는 것들이 얼마나 무수할까.


어릴 적 다니던 피아노 학원 옆 공터에는 사정이 있었다. 공사를 하려고 보니 땅 아래에서 오래된 미사일이 나왔다는 것이다. 아마 한국전쟁 당시에 파묻힌 불발탄이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적어도 폭탄해체반을 대동했을 것이다. 결국 그 집에 살던 이들은 늘 발 아래에 폭탄을 두고 있었다는 건데 풍수지리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었을까. 수맥과 다우징 로드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늦은 밤 이불 속에 누우면 늘 땅 아래 흐르는 강을 상상하곤 했다. 그 옆에는 짙은 초록색에 날개가 달린 미사일이 생겼다. 어쩌면 그 즈음부터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버릇이 생겼던 것 같다.


가까스로 애인과 나는 형편이 좋은 집을 구했다. 기대보다 더 넓은 집이었다. 나는 공을 들여 인테리어를 했다. 잠을 자는 침실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식탁, 푸른 어항이 있는 작은 방이 생겼다. 다행이란 생각 뒤에는 우리가 사는 이 집이 얼마나 좁은 땅일지를 떠올리게 된다. 발밑에 있는 미사일, 그리고 함께 사는 사람의 커다람. 마음 같아선 세상 모든 사람이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은 적어도, 나를 스쳐간 이 중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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