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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Oct 18. 2021

오래된 기억과 서랍장의 높이

Day 22

저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이 있다. 서랍장 틈새로 손을 힘껏 뻗었을 때 가까스로 손이 닿는 자리처럼. 오래된 기억은 손끝에 어렴풋이 닿고 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의 그 장면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한 아무도 알 수 없다. 검은 바다 위에 홀로 떠있는 배처럼, 오래된 기억은 늘 외딴 장면이다.


어쩌다 보니 서늘한 비유를 쓰게 됐으나 나의 오래된 기억은 꽤 포동포동하다. 다섯 살 즈음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기억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어린 시절을 다룬다. 한참 조그맣고 어리숙했던 감정이 우리 머릿속 어딘 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셈이다. 그때 나는 손을 뻗고 있었다. 4단쯤 되는 원목 서랍장이었다. 그 위에는 텐텐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하루에 하나씩 텐텐을 주셨는데 나는 촉촉한 식감과 단맛이 좋아서 늘 몇 개를 더 먹고 싶었다. 아마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텐텐을 두었던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버리고 없는 서랍장이었다. 다 커버린 내 눈높이와 비교하면 서랍장은 어느정도 크기였을까. 이제 와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요즈음은 지난 기억들을 자주 되짚게 된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그렇다. 글로 남기고 싶은 일이라 할 것이 매일 같이 벌어지진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레 오늘이 아닌 다른 날에 있던 일들을 찾아 적게 되고 뜻하지 않게 내 오랜 기억들을 꺼내 보았다. 먼지가 내려 앉은 장면들을 되늦게 되새기는 일은 천천히 스며오르는 우물처럼 마음을 채운다. 꼭 하루를 두 번 사는 일 같다. 사람은 결국 과거에 빚을 진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이 떠오른다. 그건 치매 노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소설의 주인공인 남성은 자신의 장인을 돌보고 있다. 장인은 노쇠하여 중증의 치매가 있었다. 종종 장인은 한국전쟁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따금 바닥에 엎드려 총을 겨누는 자세로 사위를 쳐다보았다. 그때마다 남성은 자신의 장인을 보며 힘겹다. 전쟁 속에 있는 장인의 표정에서 자신을 향한 살의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장인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였을까. 하지만 별 수 없이 남성은 장인을 돌봐야 한다. 이 소설은 편혜영의 다음 손님이다. 이야기의 끝은 입에 담기 힘겨울 정도로 참혹하다.


소설 속 노인은 어째서 한국전쟁의 기억에 시달린 것일까. 어쩌면 전쟁의 경험이 그만큼 끔찍하고 강렬했다는 의미였다. 노인은 젊은 날의 전쟁터에서 자신이 겪은 공포스런 장면들이 훗날 자신의 마지막 기억이 될 것이란 걸 알았을까. 그걸 알았다면 그의 삶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삶의 마지막 기억은 이미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애써 잊고 싶은,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끔찍한 기억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예감에도 반례는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들이란 책은 죽어가는 어머니를 간호하던 저자의 수기록이다. 저자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다. 어머니는 말기암 환자로 심한 인지장애를 겪고 있다. 이따금 어머니는 오랜 과거의 기억 속을 다녀온다. 저자는 어머니가 기억을 잃을수록 오히려 오래된 장면들이 남았다고 말한다. 그녀가 사랑하던 가족과 어떤 풍경들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죽음 곁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자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다시 한 번 어머니의 하염없는 사랑을 확인한다.


도리어 기억은 가장 가까운 쪽에서부터 사라지고 끝내 오래된 것들만 남았다. 이것은 신비로운 이야기다. 우리는 결국 기억을 거슬러가는 존재들이다.


지난 일들에 관한 뒤늦을 글을 쓰며 나는 미뤄두었던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 같았다. 가끔 읽지도 않을 메모를 하고 온갖 낙서로 가득 찬 수첩을 한 데 쌓아 놓듯이. 그리고 어느 날 잊고 살던 공책을 꺼내어 다시 읽는 일처럼, 때때로 지난 일들을 되짚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몸 위에 켜켜이 쌓인 기억은 결국 나의 영혼과 같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싫어하는 음식, 나를 울게 하는 것들과 사랑하는 사람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뒤를 돌아봤다. 과거에 남은 빛이 울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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