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1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을 틀어두고 그 장면에 대해 떠드는 티브이 쇼를 보았다. 문득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영화의 한 장면만을 떼어놓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오직 한몸으로 담기지만 그건 사실 까랑까랑 부딪히는 유리구슬이 담긴 주머니처럼 울퉁불퉁한 장면장면을 엮은 조각보라는 생각. 이런 느낌은 내가 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를 시달리게 한다. 나의 소설을 읽는 어느 이는 거기서 하나의 인생을 읽고 있을는지 모르지만 내겐 내 소설의 한 단락단락들이 온통 분절되어보인다. 마치 살을 이어붙인 흉터를 숨기려는 마음처럼 난 내 소설을 당신께 보여줄 때마다 자꾸 부끄러운 마음이 된다.
이런 느낌은 꼭 소설 속 인생이 아니고서도 내 인생에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흔히 우리는 삶을 계속 이어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면 분절된 단락들이 드러나서 낯뜨겁다. 실은 우리들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기획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 생활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장면들이 이어붙어있고 그 자가당착 위에 부드러운 융을 씌워놓았을 뿐이다. 다시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자기 소설이랄 것을 써본 이는 타인의 소설을 읽을 때 더는 소설이란 게 한몸의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 경험을 한다. 소설이 정교한 장치임을 아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인생이 정교한 장치임을 아는 이는 타인의 삶에서도 그의 분절된 장면들과 그 사이의 틈이 보일 것이다.
종종 어떤 사람의 틈은 너무 매혹적이어서 그 좁은 곳으로 걸어들어가고 싶어진다. 소설이 하나의 장치임을 알고 나서 보이는 건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작가의 생각과 마음이듯이 당신의 틈속에서 만나는 것 또한 당신다운 것이다. 사람의 틈이야 말로 그의 가장 진실한 모습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소설 같은 인생이든 혹은 그 인생의 틈 속 어둠이든 진실한 것은 따로 없고 애초에 본질적이고 고유한 것 따위가 없다는 말을 하고프다. 단지 때때로 우리에겐 틈이 있다는 것이며 그 틈만의 기후와 풍경이 있을 따름이라는 거.
그래서 나와 당신의 인생이 나와 당신의 기획일 뿐이더라도 그게 거짓도 아니며 진실도 아니라면 차라리 우린 우리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내게 당신의 틈이 보인다는 건 내게도 틈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며 그게 나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라면 나는 당신의 틈 속에서야 나를 사랑한다. 바꿔말하여 내가 당신께 내 틈을 보여주는 일은 당신의 사랑을 바로 당신께 주는 일이다. 이미 충분히 비약이지만 여기 작은 비약을 더 보태어보자. 내가 여지껏 말한 이 태도를 소설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걸 소설의 미덕이라고 불러보고 싶다.
그러니 소설의 바람은 더 인간다운 틈새를 써내려가는 것, 바로 그걸 당신에게 선물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