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기분이 훨씬 좋아졌지 뭡니까? 역시 가을입니다. 나는 태어난 계절에 가장 기분이 좋고 얇아집니다. 살은 여름에 찌고 가을엔 오히려 밥맛이 떨어집니다. 그건 기분이 좋아서입니다. 어제는 아침에 나가 정오가 지나서까지 걸었습니다. 넓은 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졸업 앨범을 찍는 교복 입은 중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공원을 쭉 돌다 패트병에 들어 있는 물을 마시려다 사레가 걸릴 것 같아 바로 땅바닥에 뱉어버렸습니다. 내가 기침도 그다지 하지 않자, 같이 걷던 남편이 "너, 사레도 안 걸렸는데 그냥 뱉어버렸지?" 라고 말해서 우리는 소리 내어 막 웃었습니다. 그러자 멀찍이 걷던 아저씨가 따라 미소를 지을 만큼 공원은 넓고 조용하고 하늘은 높고 그늘은 시원하고 햇볕은 질 좋은 것이었습니다. 오래간만에 햇빛을 잔뜩 받으니 공원에서는 당장이라도 잘 수 있을 만큼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삼십퍼센트 정도는 자면서 걸었고, 그러다보니 아무 말이나 떠들었습니다. 도토리를 주웠다 던지고, 솔방울을 발로 차면서 걷다가 빌딩 숲을 지날 때는 인파가 많아지고 그늘이 있는 땅은 줄어 몹시 피곤했습니다. 그러다 차가운 얼음 커피를 사가지고 잠을 이겨내며 집으로 돌아와 미지근한 물로 씻고 티브이를 보다 한낮에 낮잠을 때려 버린 좋은 하루였습니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아, 오늘 햇빛 샤워 했다." 라고 말하자 남편은 "정말 햇빛 샤워 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이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햇빛을 온몸에 끼얹어 간만에 온 몸이 싱싱해진 기분. 식물처럼 싱싱해진 기분이었습니다. 올 여름은 더위를 피해 거의 바깥에 나가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걷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도 더위가 지나쳐 집에만 있었습니다. 집에서 아무리 근육 운동을 하고, 밤에 나가 달린다고 해도 햇빛 샤워를 한 것처럼 싱싱해지진 않습니다. 정말 뻔하게도 햇빛이 부족한 몸 안, 뇌 속에서는 구질구질한 것들이 기세를 떨칩니다. 지나간 기억 중 떠오르지 않는 게 훨씬 좋은 속 좁고 구겨진, 보기 싫은 것들이 설치고 다닙니다. 햇빛 샤워만 하고 나도 건강하게 해주셔서, 너른 하늘 아래 살아있게 해주셔서, 가족들이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겸손한 느낌으로 시간 속에 서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자려고 누우면 나를 찾아오는 느낌은 살면서 누렸던 안전하고 아늑했던, 충만했던, 정돈된, 생각하면 힘이 나는 단단한 맛과 부드러운 결의, 기분 좋게 낡은 면 같은 촉감입니다. 한켠에서는 역시 높아진 하늘과 불어오는 바람처럼 너무 좋아 벌써 아쉽고 쓸쓸하고 서글퍼지는 마음을 머금게 됩니다. 나는 얼마나 연약하고 나약한 식물 같은지 그건 이런 날 저런 날에도 변함 없으나, 이 연약한 느낌의 행복은 나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