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주 Sep 13. 2023

행운

행운의 여신의 미소

  잘될 때 아무리 잘난 체 한다고 해도, 안될 땐 정말이지 어떻게 해봐도 안됩니다. 

  그러다 다시 일상 생활이 수월하게, 순순하게 풀린다고 느끼면 무언가 깨달은 것 같지만 모르겠습니다. 희망적으로 보자면, 이렇게 내려갈 때 그리고 다시 올라올 때의 느낌을 약간 기억하면서 잠잠히 견딘다거나 까불지 않는다거나 지나갈 거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기대를 품는 건 괜찮을까? 기대 보다는 그냥 알고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 거창하게 말하자면 단지 행운의 여신이 나를 향해 약간 미소 짓기 시작한 것 같은 겨우 느낌 뿐인 느낌, 타인을 바라볼 때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투명하지만 두껍고 문이 없는 유리 혹은 플라스틱으로 된 벽이 어느새 걷힌 느낌, 그보다 오히려 있는 줄 몰랐는데 걷히고 나니 있었다고 자각하게 되는 느낌, 멍한 뇌와 시야에 안개가 어느새 걷히고 시야와 머리가 다소 생생해진 느낌. 심지어 이건 날씨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날씨와 같겠죠. 여기에도 저기에도 별다른 의미는 크게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흐리고 바람 부는 날이면 머릿속이 가뿐하게 정리가 되고 몸이 가볍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아무튼 저는 모를겁니다. 이런 저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어디서부터 일어나서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안다고 생각했으나 살수록 점점 모르겠다고 느껴져 나는 다시 운이 있다는 게 자연스럽게 믿어지기도 합니다. 실체가 있는 게 중요할까? 여전히 저에게 중요한 건 기분입니다. 기분과 느낌. 


  이제 그런 건 압니다. 기분과 느낌이 좋으려면 주변 정리를 잘 해야 한다는 점, 또 미련한 정신을 이겨낼 만큼 몸을 움직이는 게 좋다는 점, 일을 미루지 말고 감당 못 할 빚을 지지 말고, 남에게 거창한 걸 기대하지 않는 게 개운하다는 점. 그러려면 나를 둘러싼 모든 건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걸 잊지 말자는 점. 그런데 그게 안될 땐? 적어도 이 권태롭고 미련하고 원망스럽고 우울한 느낌은 겨우 느낌일 뿐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자. 날씨가 좋아서 이렇게 다짐합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습니다. 나는 유별나게도 딴지 거는 걸 좋아하고 유난히 반항적이라 유난히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오래 겪어 봐서 하는 말이라고 하는 말이라면 전부 비웃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더 무서워요. 이러다 본인이 나이 들면 유난한 꼰대가 될 가능성도 큽니다. 이미 나는 20대 부터 곤조가 있다는 말이나 그와 비슷한 말을 숱하게 들어왔고, 어릴 적부터 고집 세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직접 겪어 봐야만 이러니 저러니 유난 떨며 말을 잔뜩 늘어 놓으며 깨달았다고 난리 법석인 편입니다. 아무튼 운이 좋으려면 운이 좋은 사람다운 습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건 이제야 알겠습니다. 확률이 올라가는 느낌입니다. 사람의 얼굴, 그 중 눈동자에는 영혼, 정신이 담겨 있어 흐리멍덩하고 권태로운 눈동자 보다는 생생하고 건강한, 정직한 눈을 하고 있는 게 바라보기에, 같이 지내기에, 곁에 있기에 기분이 좋겠죠, 뭐. 그래서 어른들이 눈 똑띠 뜨고 정신 차리고 다니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무딘 것보다는 날카로운 편이 좋겠고, 또 눈동자가 나쁘게 희번덕이며 돌아있는 것보다는 정직하고 평온하게 반짝이는 편이 마주치는 마음에도 좋은 느낌이라 자꾸 마주치고 싶겠죠. 나는 또다시 좋은 운이 물밀듯 밀려오면, 이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챌 겁니다. 그래서 그때 밀려드는 많은 사람들을 전부 만나고 다니진 않을 겁니다. 이게 끝없이 이어지는 게 아니라 자칫하면 고갈되기도 한다는 것도 눈치챌 겁니다. 아무나와 나눠 쓰진 않을 거고, 아무렇게나 간수하진 않을 겁니다. 잘 보관하려고 할 겁니다. 서로 신의를 지킬 수 있는 사람, 아니면 진짜 재밌는 사람 말고 눈 돌아있거나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거나 심지어 싫게 느껴지는 사람과는 시간을 보내지 않을 겁니다. 예전에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운이 좋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자만하고 아무렇게나 지냈습니다. 되는대로 시간을 보내고, 만나자는 모든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상하게 탕진해 버렸다는 걸 이제는 인정합니다. 마치 로또라도 된 것 같겠지만,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제 스피또 5000원 어치 중 천 원 한장 당첨되지 않았습니다. 

  거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기 싫은 멍한 눈을 기분 하나도 안 좋게 뜨고 있는 얼굴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볼 때도 존재하던 두꺼운 유리막이 사라진 채 마주친 똑바로 눈을 뜨고 있는 얼굴이 거울에 비쳐 보였습니다. 이럴 때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기필코 알아내고 싶지만, 그런 건 없다는 걸 알 것 같습니다. 날카로운 눈, 끊임없는 잔 진동에 시달리느라 눌어 붙어 다시 재생될 것 같지 않았는데 어느새 어딘가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 마음에 드는 눈동자의 빛, 안심이 되고, 믿을 수 있는 자신의 눈. 


  오늘은 그런 기분이었다 이겁니다. 어제 많이 걸었거든요.

작가의 이전글 햇빛 샤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