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레씨 Jun 10. 2022

강은 나이가 없고 나는 늙어가지만

 아빠의 한탄 끝에 옮긴 아파트는 의외로 마음에 쏙 들었다. 주변에는 온통 오래되고 촌스러운 건물들 뿐이었지만 지하철이 가깝고 아이들이 많았다. 조용하고 투박할지언정 정이 배인 동네였고, 정이라는 명목으로 서로를 옭아매기에는 서먹한 분위기였다. 신경질이 날 정도로 좁은 도보를 쭉 내려가면 강변이 나왔다. 번 와본적은 있으나 설마 여기서 살게 될 줄은 모르고 기억에서 흘려 보낸 곳. 흉하게 낀 녹조와 악취로 남아있던 그곳은 곧 내가 사랑하는 장소가 되었다. 나는 강변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는데, 대부분 돌이킬 수 없는 지난 날들을 잊으려는 마음에서였다. 강변으로 향하면 어김없이 짙은 풀 냄새가 났다. 거칠다고 느껴질 정도의 풀내음이. 물이 얕은 구간에서는 악취가 났지만 조금만 깊숙이 들어가면 비린 강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거기서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푹 떨군 채 걷고 있으면 기분은 나아지거나 엉망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끄러운 아이돌 노래나 잔잔한 인디 가수의 목소리. 강은 늘 비슷한 용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기분은 그 날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달려 있었다. 강은 호수처럼 고여있지도 않고 바다처럼 광활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느리게 흘러갈뿐이라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한 자리에 머무는 것도 모험을 떠나는 것도 두려워 하는 나는 그저 천천히 흐르는 강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덧붙여 느슨한 자연의 대화에서도 쉬어갈 수 있었고. 세상의 소리를 100까지 매길 수 있다면 강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30 정도로 가늠할 수 있었다.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나로서는 집 앞에 강이 있다는 사실이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강은 꼭 조용하면서 속 깊은 친구 같았다. 유리잔에 비쳐도 부끄럽지 않은 표정을 짓는 친구들. 한바탕 속앓이를 끝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강인한 존재들. 내가 어떤 고민을 들고 가더라도 강은 위로도 비난도 하지 않은 채 내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것 때문에 매일같이 강으로 향했다.


 복잡하지만 잘 다듬어진 서울에서 때때로 강을 떠올린다. 서울에도 한강이 있고 청계천이 있고 양재천이 있다지만 누군가 강 하고 내뱉으면 여전히 유천교가 떠오를 것이다. 스산한 버드나무와 외롭게 빛나는 공장의 굴뚝이 보이는 강변이 그리울 것이다. 그러다 줄곧 그리워 했던 강변으로 다시 내려갔을 때, 생각보다 볼품없는 풍경 발견할 . 여전한 강과 늙어가는 나도.

매거진의 이전글 백미터 마라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