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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레씨 Sep 04. 2022

백미터 마라톤

사람들을 잔뜩 실은 버스가 덜컹거리며 고층빌딩들을 지날 때 그는 풀숲 한가운데 서 있기도 한다. 많은 것이 정제되고 다듬어진 서울의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상상을 부풀리지만 그를 두렵게도 하는데, 그럴 때는 고향의 강변을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그는 앞으로 펼쳐질 지난한 인생을 짐작하며 해가 질 때까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곤 했다. 그러다 우울한 강아지의 표정을 보고는 미안,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곤 비척거리며 산책을 나섰다. 그는 낮과 밤의 경계에서 하늘이 만들어내는 그림을 무척 좋아했는데 모네보다는 우울하고 클로드 로랭보다는 화사한 풍경화였다. 귀뚜라미들이 슬금슬금 울어대기 시작할 무렵 그곳을 걷기 시작하면 그는 안락한 울적함에 잠길 수 있었고 때로는 아주 멀리까지 걷기도 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강아지와 함께 유채꽃이 만발한 길목을 걷고 달리고 서로 떼를 쓰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강아지를 자주 산책시켜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대부분은 혼자서 그 길을 걸었다. 봄이든 여름이든 콧물을 훌쩍거리게 되는 초겨울이든 그 길을 걷고 또 걸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그는 이상하게 뒷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머리는 산발이고 자세는 엉망인 여자애. 때로는 단정하고 귀여운 옷을 입었지만 대부분은 다 늘어진 티셔츠와 헐렁한 면바지를 입고 터벅터벅 걷는 뒷모습이. 머리카락은 야트막한 언덕과도 닮아 있었는데 그 때 여자애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 머리가 절대로 턱 끝을 넘기지 않도록 했다. 완고한 고집 탓에 그 애는 사사건건 어른들과 충돌했다. 머리가 짧았던 여자애를 떠올리면 화사한 유채꽃 사이를 어기적거리며 걷는 뒷모습으로부터 장면은 이동한다. 집 전체를 싹 다 새로 뜯어 고쳐 깔끔하고 예쁘장하지만 물건들이 불규칙적으로 늘어져 있고 항상 지저분했던 여자애와 가족들의 집으로. 


 #3 주방에서. 장면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내 등이 화면을 가리며 불쑥 들어왔다가 주방 쪽으로 멀어진다. 여자애는 집 안쪽에 위치한 주방으로 돌아와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대리석 식탁 위로 식재료를 올려놓는다. 종량제 봉투 20L 안에는 걸어서 40분 걸리는 대형마트에서 사 온 여러가지 냉동식품들이 가득 차 있다.걸어서 40분 걸리는 대형마트까지 굳이 굳이 다녀오느라 녹초가 된 그 애는 더위를 먹은 탓에 신경이 날카롭다. 식탁 위로 와르르 쏟아진 냉동식품은 죄다 포장지가 초록색이다. 식물성, VEGAN 이라는 글자들이 촌스럽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될 것을 마음이 급해 당장 사와 버린 그 애는 냉장고를 열어 젖히고 식재료와 냉동 식품을 꽉 꽉 집어 넣는다. 어젯밤 동생이 먹다 남긴 치킨과 아빠가 비닐도 덮지 않은 채 넣어둔 김치 탓에 냉기에 불쾌한 냄새가 섞여 있다. 냉동실에는 3달 전 사놓은 비건 소시지가 있는데 유통기한이 이미 지나 있다. 먹지도 않은 새 것을 뜯어서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느라 여자애가 베란다에 쭈그려 앉는다. 원하던 것을 전부 냉장고에 넣었는데도 그 애는 굉장히 화가 나 있고 조급한 표정을 짓는다. 바보 같지만 완고한 과정을 그로부터 일 년 가까이 반복하던 여자애가 집을 나선 것은 갑작스러웠고, 자신만만한 태도와는 다르게 그 애는 계속해서 가족의 손을 빌렸다.

 

그 애는 항상 그런 식으로 고집을 부렸다. 


 여자애한테는 절대 꺾이지 않는 고집이랄지, 언뜻 이해가 가지만 보고 있으면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 애는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늘 화가 나 있었고 주변 사람에게도 가끔 그런 태도를 보였다. 자기파괴에 가까운 도덕적 강박은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을 괴롭게 했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 애를 받아주었고 때로는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그런 악순환이 끊긴 것은 여자애가 친구와 둘이서 자취를 시작 했을 때였다. 친구는 여자애에게 많은 것을 맞춰주었고 여자애는 그런 친구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그 애를 느슨하게 만들어주었다. 오랫동안 뻣뻣하게 뭉쳐 있던 어깨가 풀리고 몸이 바로 서는 감각이 매일 찾아왔다. 다시 몇 달이 지나고 여자애는 서울에서 직장을 얻어 혼자 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부모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애는 부모와 싸우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부모를 이해했다. 여자애는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짧았던 머리는 부쩍 길었고 식탁에는 고기를 자주 올렸다.


그는 훨씬 더 편하고 단정한 삶을 원하는 자신을 발견했고 출근길마다 지나치는 넓고 깊은 한강은 그런 마음을 부추겼다. 이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저녁이 되면 늘 풀과 유채꽃이 무성한 강변을 걷는 뒷모습이 떠올랐고 그는 곧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는 이대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다시 풀숲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호흡이었다. 강변 옆에 사는 동안 그는 늘 백미터 마라톤을 하는 기분이었고 항상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일상은 마라톤 끝에 몰려오는 고통 같은 것. 얼얼하고 날카롭고 후덥지근한 호흡이 따라붙을 수 밖에 없고, 편하게 숨을 쉬는 모습이 이상한 마라톤 같은 것. 그는 백미터 마라톤을 다시 시작하기까지 머뭇거린 이유가 호흡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족한 점을 찾아냈으니 다시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생일이 돌아오기 전까지 목적지에 다다르겠다고, 그는 결심한다. 바로 달리지는 못하고 선 근처를 서성거리고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자세를 잡는다. 풀과 귀뚜라미가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템포를 잘 조절해보기로 마음 먹는다. 처음에는 느슨하게, 호흡을 고르기도 하고 달리다 점차 빠르게, 그러다 잠시 멈춰서 쉴 것이다. 어떤 구간에서는 전속력으로 달리느라 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때는 달리고 넘어질 것 같을 때는 잠시 속도를 낮추겠다고 그는 약속한다. 


그는 달리기 직전 뒤를 돌아본다. 여기가 출발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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