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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레씨 Jan 31. 2023

우리는 바나나를 잔뜩 먹어둬야 해


누워 자려고 하는데 핸드크림에서 바나나 향이 났다. 바나나향이 아닌데 바나나향이 났다는 건 내가 지금 바나나가 먹고 싶기 때문이다. 이상한데 겨울에 웬 바나나람 하고 의아해하다 겨울이야말로 바나나를 먹기 좋은 때임을 깨달았다.


여름에는 잠시만 바나나를 방치해두어도 초파리들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일으키듯이 태어난다. 검지와 엄지로 집어들어 쓰레기통에 버려도 초파리 새끼들은 계속해서 태어나고 나는 그만 아연해진다. 여름은 초파리의 계절. 그러니까 바나나는 겨울에 먹어야 가장 편하고 맛있다.


바나나는 여름에 태어났으니까 당연히 여름에 먹는 과일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이상해진다. 세상 모든 작물이 태어난 시기가 제일로 맛있는 시기라지만 요즘은 다르지 않은가. 비닐하우스도 있고 스마트팜도 있고 해서 편하게 먹는게 가장 맛있다는 주장이다.


어라 써놓고 보니 잘 모르겠다. 태어난 시기랑 제일 맛있는 시기는 다르니까 사람도 그렇다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사람도 후숙을 해야 영글어지는 것이 있고 제때 먹어야 달고 깊은 것이 있다 말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영 틀려먹었다. 바나나에서 철학을 찾으려던 내가 틀려먹었다.


그래도 역시 바나나는 여름에 먹는게 제일 맛있다. 초파리가 태어나 조그만 원룸을 빙빙 돌아 다니고 나는 그 안에서 바나나를 우물우물 삼키는 것이 가장 낫다.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바나나가 있을 때 먹는 것이다. 바나나 먹기 힘든 때이든 좋은 때이든 있는 것을 음미하고 감사하며 먹어야 한다.


때가 무슨 상관인가? 바나나가 사라지면 여름이고 겨울이고 바나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텐데. 바나나 바나나 노래를 부르며 바나나신에게 바나나를 다시 내려달라 애원할텐데. 정말로,


우리는 바나나를 잔뜩 먹어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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