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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숙 Apr 08. 2024

검정 고무신

고무신과 비교되었던 존재감

아직 푸른빛도 벗지 못한 감들이 나무로부터 버림받아 떨어져 뒹구는 8월이었다. 현숙이는 바로아래 동생과 이웃마을 감나무아래 떨어진 땡감을 주우러 갔다. 집을 나설 때는 햇볕이 쨍쨍했었는데 감을 찾아 풀숲을 뒤지는 사이에 먹구름이 한바탕 소나기를 몰고 왔다.

동생과 함께 나무아래서 비를 피하던 현숙이는 비가 소강상태를 보일 때 동생손을 잡고 집을 향했다. 이미 젖어버린 생쥐 같은 꼴을 엄마께 들키면 된통 혼나겠구나 생각하며 논둑으로 난 지름길로 서둘러 돌아오고 있었다.


 작은 수로가 있는 곳에 당도하니 어느새 수로의 물이 불어 넘칠 듯 흐르고 있었다. 큰길로 이어진 다리를 건너면 안전하겠지만 한참을 돌아야 하는 것이 귀찮았다.

동생을 세워두고 -언니가 먼저 건넌 다음에 너도 건너-라고 말하고 학교에서 멀리뛰기하던 실력을 가늠하며 저 정도는 건널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생겼다. 멀리뛰기에서 반에서 3등을 벗어난 적이 없는 현숙이었다.


하나, , 셋, 구령을 부르며 힘껏 건너뛰었다. 그러나 수로의 둑은 이미 비에 젖어 현숙이의 발이 닿는 순간 흙이 무너져 버렸다. 현숙이의 몸도 함께 미끄러져 물속으로 하반신이 잠겼다. 순식간에 몸과 정신의 균형을 잃었지만 본능적이었는지 오른손이 둑 위에 풀을 콱 움켜잡았다. 다행히도 결초보은에 쓰였던 그 풀은 현숙이의 작은 몸을 지탱해 주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둑위로 기어 오른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한쪽 발의 고무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콸콸 소리 내며 기세 좋게 흐르는 물살을 따라가 보았지만 신발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다가 포기하고 건너편에서 겁에 질려 울고 있는 동생을 달래며 큰길 다리가 있는 곳까지 와서 상봉을 했다.


 흙탕물에 홀딱젖은 언니의 꼬라지를 보고 동생은 또한번 훌쩍였다. 하지만 현숙이는 한 짝밖에 남지 않은 신발을 바라보며, 옷이 젖어 혼날 거라는 생각과, 좀 전의 죽을 뻔했던 상황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잃어버린 고무신 한 짝을 엄마께 어찌 설명할지 그 생각만이 모든 걱정을 삼켜버린 것이다. 작은 머리를 굴리며 추적추적 집으로 왔다. 그 와중에도 언니 죽을 뻔했던 이야기는 엄마한테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동생을 단속하면서... 약 그 사실을 알면 "되져 버리지 왜 살아왔냐?"라고 하실 것 같았다. 좋은 건 양보하고 궂은 것은 모두 감당해야 하는 맏딸의 하찮은 존재감에 작은 현숙이의 몸은 더욱 작아졌다.


집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엄마는 "다 큰 지지배가 뭐 하고  다니길래 신발까지 잃어버리고 왔냐?" 아버지 오시면 혼날 줄 알라고 하셨다. 그 와중에도 갈아입을 옷을 챙겨주셨다. 13살 현숙이는 소용돌이치면서 자신을 끌어당기던 물살보다 고무신 한 짝 잃어버렸다고 아버지께 엄마가 일러바쳐서 큰 야단을 맞을 것이 더 무서웠다. 그 고무신은 며칠 전 장날 동생에게 운동화를 사줄 때, 낡은 고무신을 꼼지락 거리며 풀이 죽어있현숙이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허허, 우리 큰딸 신발도 사야겄네- 한마디 하셔서 얻어 신은 검정고무신이었다.


차라리 그 물살에 휩쓸려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혼나지 않았을 거라는 마음에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일찍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 신발 한 짝만 신고 학교에 가는 꿈을 꾸면서... 그리고 다음날 부엌에서 밥 짓는 소리에 잠이 깨어 나가 보니 새로 산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있었다.




상표가 선명한 검정고무신을 쳐다보며 마루 끝에 앉아있는 13살 현숙이의 모습이 영상처럼 떠오른다. 혼날 줄만 알고 꿈속에서 조차 걱정하던 마음이 환하게 기쁨으로 변하던 순간이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엄마의 한마디가 환갑의 나이가 되도록 힘든 시간들을 이겨내도록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는 우리 집 큰딸, 어딜 댕겨 다치고 댕기 되여! 신발 잘 신고 조신하게 댕겨!-


큰딸은 오빠나 동생들한테 모든 것을 양보하고, 동생들 돌보고, 엄마의 빈자리를 메꾸며, 잘못된 상황에서 대표로 혼나기만 하는, 엄마의 구박받이인 줄 알았는데 다치고 다니지 말고 조신하게 다니라는 엄마의 한마디에 함부로 다쳐서도 안 되는 존재임알았다. 하물며 잘못해서 죽기라도 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거라는 작은 존재의 소중함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새 신을 얻었을 때 며칠 동안 안고 자고, 들고, 맨발로 다니던 습관은 그 이후로 고칠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아무렴! 내가 저깟 고무신 한 짝만도 못할리야 없지!"라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자존감이 마음 놓고 소중한 내 발을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고무신에게 넘긴 것이다. 


고무신과 존재의 경중을 비교할 만큼 큰딸로서 받은 책임감은 컸고 자존감의 낮았다. 지금도 동생들이 집안 대소사를 다 거들고 있지만 큰딸이니까 좀 더 큰 짐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어쩌면 운명처럼 큰딸들에게는 주홍글씨 같은 것이 혈관을 타고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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