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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구일 Dec 06. 2021

새벽기행

인천에서 유성.

 대학교 3년, 머나먼 남쪽의 타지로부터, 북녘 야전까지 함께 동고동락한 동문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니. 

정말로 기쁜 날이다.


 당최 원인을 알기 힘든, 거대한 무력감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시야의 무게감에 근 두어 달을 비몽사몽 하며 지내던 차였다.

 바쁘고. 할 일은 많은데, 실제로 해야할 것들에 비해 그것을 방해하는 아침잠이나, 

게임, 웹서핑, 음주라는 놈들은 늘 내 곁에서 5분만, 한 판만, 이것만, 한 잔만을 더하며 알량한 30대의 일상을 잡아먹는다.


 이젠 정말로, 5분만에 5분을 더해, 10분만이 되고. 끝내 오전을 냅다 포기해버리는지라 '갉아먹는다'라는 표현은 글쎄, 아직 정신 못 차린 작자의 자기합리화.


딴띵똥- 땅..


 공오시 알람은 더없이 우렁차다. 기겁하듯 벌떡 일으키는 몸에, 토끼 같은 아내도 놀랐는지 고개를 빼꼼 든다. 그 모습에 미안함을 느끼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충전기가 꼽힌 휴대폰을 낚아챈다. 

뻑뻑한 흰자위에 잔뜩 지푸린 얼굴로 식탁에 가 앉는다. 


 다행히도 정신을 차리는 속도가 여느 때보다 빠르다. 홍삼•녹용이라 쓰인 붉은 포 하나를 나가기 직전 담배 대신 삼킬 요량으로, 식탁에 툭 던지어 놓고는 나갈 채비를 한다.


 기름을 자글하게 말라 바짝 세운 머리, 붉은 와인색 내복, 남색 터틀넥, 남색 정장, 검정색 롱 코트. 나름대로 포인트 준 버건디 양말.

 두꺼운 유니세프 반지, 3부 다이아가 박힌 결혼반지. 마지막으로 클래식한 일자 브로그로 재봉된 맞춤 구두.


 공육시 집을 나선다. 아내는 잠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우물우물 배웅한다. 

 하늘은 보라색인지, 남색인지 모를 경계에 있다. 겨울 새벽바람의 날카로움에 시야는 점점 또렷해진다. 그 내음이- 부지런함, 활력을 불러온다. 아마 깊숙한 곳에서는 '필사적인' 각오를 꺼내올지도 모르겠다.

 제아무리 토요일이라도, 이 시간대에는 꼭 노인들이, 배회하기 마련이다. 젊은이는 몇 없다.


 시장 인근 지하철역 안에는, 펭귄처럼 몸을 옷가지 속에 파묻고 가만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간만에 신은 구두 때문에 정강이를 덮은 이름모를 근육이 아파 오던 차,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천천히 들어오는 지하철. 아직까지는 인적이 드물어 앉을 자리가 있다.

 은빛 금속으로 된 지하철 좌석 때문에 출발할 때는 살짝 뒤쪽으로, 다시 멈출 땐 앞쪽으로, 달리는 중에는 슬금슬금 밑으로. 자꾸 자리에서 미끄러진다.


 인천터미널.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터미널도 많이 바뀌었다. 대학시절, 대전과 인천을 오가려 한 달에 두어 번씩은 방문하던 곳이었는데. 구조가 바뀐 곳은 없지만 어딘지 쾌적해 보였다. 나는 경험을 더듬어, 버스 안은 건조할 것이므로, 터미널 안쪽에 있는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을 샀다.

 휴대폰으로 예매한 승차권의 QR코드를 찍으며 그제서야 좌석을 확인한다. 재차. 예전 같았으면, 터미널에 도착하면서부터- 내가 앉아야 할 자리를 달달 외우면서 버스에 올랐을지도.


 떠오른다. 20대의 초반에는, 혹여나라도, 옆 자리에 예쁜 여대생이 앉지 않을지- 조금은 설레여하던 것이. 지금은 오히려 빈 옆자리에 감사함을 느끼며, 메고 있던 가방을 놓고, 다리를 벌리어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댄다.

 가방에서 책 하나를 꺼내 책갈피를 가른다. 몇 자, 한 장 쯤 읽어 내려가자마자, 버스 기사는 실내등을 끈다. 암실- 허탈함 약간 느끼며, 차창의 커튼을 젖힌다. 아침은 어김없이 어스름을 비추기에, 몇 장 더 읽어 내려간다. 책을 읽으면서도, 이 새벽의 기운이 왠지 모를 기대감을 불러 온다. 


유성행.


 가장 찬란했던 기억의 소굴로 빨려 들어가듯, 버스의 박동하는 엔진, 그르렁거리는 진동이 함께 가장 젊었던 날들을 향해 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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