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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구일 Jun 06. 2022

눈물이 부끄럽다.

황구일 시집

내 속마음 발가벗겨져 물방울로 내비치는 게

아직은 수줍어서,

그런 수줍음 내 손으로 일궈냄이

그 찰나를

그 선택을

눈을 가리려 해도

투명하기만 해서.



나는 잘 울지 않는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실천하진 못했다만, 남자가 운다는 건 내겐 수치스럽고 무척 부끄러운 일이다. 어렸을 때 엄청난 땡깡쟁이였기 때문에 내 인생 대부분의 눈물을 미리 쏟아냈기 때문일까? 20대를 훌쩍 넘기고 나니, 사람 사이의 갈등에서 눈물 흘릴 기회가 거의 사라진 것도 한 몫하는 듯 하다.


아내와 함께 재미있게 시청하는 드라마가 있다.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작품인데 정말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 아름다운 연출(특히 백 개의 달, 오징어잡이 배로 연출할 것을 예상했던 내게 아내분께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배우들의 열연은 물론, 억지스러운 신파가 아닌 이야기를 통해 우리네 삶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소환하고 시청자들이 크게 공감할 수 있게 만든 노희경 작가님의 역량이 새삼 대단했다.

 '우리들의 블루스'를 시청하며 하마터면 인천 사나이 황구일의 눈에서도 눈물이 찔끔 나올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나는 무엇이 부끄러워 눈물을 꾹꾹 참아댔을까.


눈물은 우리의 속마음이다. 인간이 슬픔을 내비치는 대표적인 표현법으로 우리가 가진 가장 여린 감각을 표출하는 행위이다.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 어찌할 줄 모르는 때에도 우리는 곧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무능의 호소랄까. 어쩌면 눈물은 마음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핏방울이요, 그 상처가 아물며 나오는 회상의 고름일 수도 있겠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지만 글세, 기쁘면 마냥 웃는 타입이라.


눈물 방울은 투명하다. 눈 앞을 가릴 듯, 얼굴을 모조리 덮어버릴 듯 흘러 나오지만 눈물만으론 도무지 부끄럽고 수줍은 그 추태를 가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눈물을 흘린다는 행위는 내겐 아직 수줍다.


우는 이유야 많겠지만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대개의 결과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 빚어진다. 슬픈 결말을 기대하며 영화 시청을 계속하건, 연인과의 다툼이나 헤어진 인연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던 일, 그로 인한 이별이건. 특히 죽음에 대한 슬픔을 크게 느끼곤 한다. 누군가에겐 과격하고 이해못할 발언이겠지만, 우린 이미 수명과 생애라는 개념 하에 누구나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지 시간 축에 종속된 존재로써 죽음을 맞이할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는 무지와 존재의 소멸이라는 궁극적 공포에 대한 황망함에 어미가 사라진 갓난아이처럼 울먹이거나, 통곡을 터뜨리는 것이다.


어째 눈물을 흘린다는 것, 무의미하다.

투명한 눈물방울은 앞 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가리지도, 서러움 범벅이 된 후줄근한 얼굴을 가리지도 못하니. 그 허망함이, 다 큰 녀석이 무의미한 일을 주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창피했다보다.


슬픔은 눈물이 흐르고 눈물샘이 마르는 동안 존재한다. 내일이면, 하루라는 시간이 부족하다면 다음주라도, 또는 그 다음 달, 내년에라도 슬픔은 가라앉게 되고 우리는 일상으로, 또다른 즐거움을 찾아 나설테다.

어쩌면 눈물이 나는 날에도 두 눈을 들어 앞날을 바라보라고 우리의 눈물이 투명한 것일지도.

어쩌면 그 투명한 눈물 너머로 네가 나의 슬픔을 알아봐 달라 투명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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