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 라인업을 보며
경기 시작 약 한 시간 전, 선발 라인업이 공개된다. 투수는 보통 팀이 전략적으로 강구한 로테이션에 의해 움직인다. 1선발부터 5선발까지 정해져 있어 그날의 선발 투수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간혹 선발 투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예상치 못한 선수가 선발되기도 한다. 타자 역시 최상의 선발 라인업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또한 유동적이다. 타자를 선발할 때는 공격과 수비를 함께 고려해야 해서 투수보다 변동 가능성이 큰 편이다.
공개된 선발 라인업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감독이 오늘 경기에 사활을 걸었구나' 혹은 '오늘 경기는 져도 괜찮은 건가'라고.
선발 투수 로테이션만 잘 돌아가도 한 시즌을 좋은 결과로 마무리할 수 있다. 다수의 팀들은 5명의 선발 투수 중 외국인 투수 2명, 국내 선수 3명을 배치한다. 선발 투수들이 안정적으로 팀을 잘 이끌어가면 5할의 싸움인 가을 야구(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시즌 시작 즈음 발표한 선발 로테이션이 시즌 종료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중간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선발 로테이션에도 변화가 생긴다.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늘 우리 삶에 존재하듯 야구 경기에도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늘 존재한다.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바뀐 선발 라인업에서 낯선 이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럴 때마다 낯선 이름의 그 선수가 진심으로 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응원의 마음을 가득 담아 포털 검색창에 선수의 이름을 입력한다. 대다수 신인일 때가 많은데, 가끔은 우여곡절 가득한 야구 인생의 소유자와 마주할 때도 있다. 이럴 땐 응원의 마음이 좀 더 커진다. 어렵게 얻은 이번 기회에 꼭 뭔가를 보여주길 염원한다.
얼마 전 찐득한 야구 역사를 가진 삼십 대 중반의 투수가 선발로 등장한 경기를 보았다. 프로에 입단하였으나 1군 무대에 제대로 서본 적도 없었고 2군에서 생활하다 육성선수(대개 신인 지명 드래프트에서 어느 구단의 선택도 받지 못하거나, 소속팀에서 방출 후 이적 제의를 받지 못한 선수들이 프로 야구 선수를 계속하기 위해 육성선수 방법을 택한다.)까지 되었던 투수였다. 그리고 최근엔 오랜 세월 함께했던 팀에서 이적하여 새로운 팀에서 마지막 힘을 다하는 그런 선수였다.
선발로 등장하기 며칠 전 불펜 투수로 등장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줘 수훈선수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도중 그가 흘리는 감격의 눈물을 봤던 터라 이번 선발에서 진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바랬다. 그 역시 얼마나 잘하고 싶었겠는가. 자신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기회에 실수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떨리는 마음에 실수를 연발하는 그는 결국 일찍 마운드를 내려갔다.
쓸쓸한 그의 뒷모습을 보니 어느 순간에나 평정심을 유지하며 단단한 마음을 가지라고 외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떠올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재위 161~180)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는 [명상록]을 저술한 스토아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살던 시대는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고 페스트의 유행으로 제국이 피폐하던 때였다. 결국 그가 죽고 로마 제국은 쇠퇴한다. 로마 제국의 황금기가 저물어갈 무렵 황제가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쟁터에서 여러 해를 보내며 틈틈이 [명상록]을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다.
[명상록]은 인생과 우주, 자연의 이치 그리고 신들의 존재 방식에 관한 스스로의 생각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이다. [명상록]이라는 이름은 후대 사람들이 그의 글을 모아 이름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불편할 때 펼쳐보는 책들이 몇 권 있는데 그중 하나가 [명상록]이다. 가볍게 읽기도 좋고 생각이 복잡할 때 읽으면 마음이 정돈되기도 한다. 성경의 잠언과 유사한 문장이 많은 편이라 마치 사랑과 관용을 외친 종교서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요즘 사람들이 관심 갖는 마음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문장들이 많이 등장하다 보니, 철학서로서 굉장히 유익한 책이라 생각한다.
그가 [명상록]에서 전한 문장을 소개한다.
거품 같은 명성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당신의 눈앞에서 얼마나 빨리 잊혀지는지,
또한 우리의 전후에 영원의 심연이 둘러싸고 있음을 기억하라.
갈채의 메아리는 얼마나 공허하고 찬양하는 자들의 판단은 얼마나 변덕스러우며
인간의 무대는 얼마나 협소한가.
이 세계는 단지 하나의 점에 불과하며 우리 자신의 거주지는 그 안의 미세한 모퉁이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당신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있겠으며,
또한 그들은 얼마나 허무한 존재들인가?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씨름하거나 긴장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라.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되기란 쉽지 않다.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다. 야구 역시 잘하든 못하든 프로에 입단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대단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프로에 처음 입단했을 때, 그들은 세상을 모두 가진 기분이었을 거다. 그 성취감은 말해 뭐 하겠는가.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합격 소식을 듣고 처음 직장에 출근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만큼은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과 뿌듯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감정이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싶어 애쓰는 우리처럼 야구 선수들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때론 넘지 못하는 벽도 존재한다.
단단하고 높은 벽 앞에서 무너지는 선수들을 볼 때면 마음이 쓰리다. 프로선수의 평균 은퇴 연령은 직장인과 비교해 빠른 편이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본인들이 더 잘 알기에 어떻게든 잘해보고자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다. 조급해하는 그들에게 마르쿠스의 문장을 전하고 싶다. 괜찮다고 조금 편하게 마음을 내려놓자고. 잘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동안 연습하고 노력한 결과를 조금이라도 보여주게 안정된 마음을 갖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야구 경기를 보며 SNS접속할 때가 있다. 사람들이 올리는 실시간 댓글을 보며 경기를 보는데 소통의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종종 눈살을 찌푸리는 글을 볼 때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잘 풀리지 않는 경기에 속상할 터인데 저런 막말까지 들으면 기분이 몹시 불편할 것 같다. 부디 선수가 SNS를 당분간 보지 않길 바라며 글 하나에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에도 불안과 초조함, 미움과 괴로움 같은 불편한 감정이 무한 반복 발생한다. 출근길 막히는 도로 위에서 지각에 대한 불안함때문에 초조하고, 타인에게 분명 배려했음에도 내게 들려오는 말이 부정적일 땐 세상만사가 모두 귀찮다. 불편한 감정은 늘 꼬리를 물기 때문에 생각을 끊어 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지나치게 냉정하고 가혹한 프로의 세계에서도 불안한 감정을 내려놓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이제 그만 불안해하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당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