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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닮은 Apr 21. 2022

관계의 시소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내심’이라는 단어를 붙였을 때 한 가지 정도는 다들 바라는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창창한 나이 30대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바라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현실적으로 풍요한 삶을 바란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만족할 만한 수입을 꾸준히 얻으며 사는 것. 그로 인해 돈을 모아 원하는 집과 차와 물건을 사고 재테크를 하는 것. 또한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을 잘 보살필 수 있는 것. 이렇게 적고 보니, 내가 정말 현실적인(보이는 것들에) 것들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며 산다는 생각에 조금은 애처롭다. 옳게 쓰면 이 현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잘 이어주고 해결해 줄 수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정말 보이는 것들로 스스로도 판단하고, 타인도 판단하는 못된 버릇을 가졌다.


오늘 하루 종일 난 참 즐거웠는데 밤이 되니 왜 이런 우울한 글이나 쓰고 있는지 변명을 하자면 한 친구와의 문자에서 조금 껄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 적은 물질적인 것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적으로도 웬만하면 불편함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말이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어쩌면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라, 관계의 풍요인지 모른다. 사람과의 관계 말고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일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정적 불편함이란 사람 사이에 느낄 수 있는 영역인 것 같다. 근래에 나는 '편한' 사이를 최고로 친다. 이전엔 편하다 불편하다를 굳이 나누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람을 불편하게 느낀 경험이 없었던 것에 비해 요즘에는 사람을 만나며 불편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영역은 다르지만, 내게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특정 인물들이 있다. 대개 가까운 친구 몇이 그런데 친하고(친했고) 함께 나눈 이야기와 추억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어느 날부터 그런 느낌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몹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지금껏 내가 느끼는 그 불편함에 대한 것 자체를 불편히 느껴왔다. 마치 내가 잘못된 느낌을 일부러 느끼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꽤 오랫동안 그 불편함을 느끼는 내가 잘못이라는 식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읽은 책에서 내가 느낀 관계의 불편함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발견했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기 위해 내가 무리해서는 안 돼.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진리지. 내가 나를 억누르고 상대가 원하는 바대로 하게 두면, 그리고 아무리 봐도 그 요구가 부당해 보인다면, 내 안에 분노가 쌓이게 돼. 의무감에서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진심으로 그 상대를 좋아할 수가 없어." 요조, 임경선,『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관계의 시소'가 정확히 평행이 아니라는 것 즈음은 우리 모두가 안다. 관계가 평행이기를 바라지만,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때에도 기울어짐이 존재한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관계의 시소를 바라보면 대개 약간의 무게가 상대에게 가 있는 경우였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되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분명 즐겁고 좋은 관계였던 사이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리하여 상대적 강자와 상대적 약자가 생겨 한쪽은 어느 정도 군림하고 한쪽은 또 어느 정도 복종하는 모습이다. 불편함을 느끼는 쪽은 당연히 어느 정도 복종하는 쪽이다. 대개 연애 관계에서 이런 류의 이론이 펼쳐지나, 내 경험상 비단 연애 관계에만 속하는 내용은 아니다. 그 관계를 더 소중히 생각하는 쪽이 상대를 배려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배려를 받는 쪽 입장에서 그것을 당연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배려를 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시소는 평행으로 맞출 방법이 있는 물체다.

여기서 나의 약점 하나를 밝힐 수밖에 없겠다. 나는 매우 솔직한 사람이나, 관계 안에서 느끼는 불편함에 대해선 솔직히 말하기 어려워한다. 나는 관계의 불편함을 솔직하고 지혜롭게 말해온 경험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느끼는 부정적 감정에 대해서도 침착히 반응하지 못한다. 이 감정 자체가 내게는 나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만이 겪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다른 것은 똑 부러지게 잘 전달하고 표현하면서도 유독 부정적 감정을 전달하기 어려워하는 것이 내게는 참 짜증 나는 일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사귀어온 친구들과 안녕을 하기도 했고, 좋아하는 사람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한 적도 많다. 모두 퀘퀘 묵은 감정의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막연히 알았던 나의 이런 약점에 대해 직면하게 된 것은 상담을 하면서부터다. 내 마음에 부정적 감정이 너무 많이 쌓여 주체할 수 없었을 때 우울증을 진단받았고, 약에 의존하고 싶지 않아 상담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게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아 쌓인 것들이 결국에 터져 나를 힘들게 하는 거라고. 그 배경은 어렸을 적 양육환경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진단받았다. 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지만, 결코 화목하게 자라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경험해야 했던 감정의 이해와 표현의 연습이 내게는 없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나의 내면적 불편함의 뿌리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과거의 지난 것들에서 시작되었다고 자꾸만 말하면 무엇 하나. 이미 지났고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 하고. 선생님은 그 쓴 뿌리의 기반을 알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한동안은 내가 어린 시절 학습했어야 하는 것들을 가르치지 못한 엄마를 계속해서 원망했다. 선생님은 그런 원망도 해야만 한다고 했다. 상담을 받고 나의 반응의 이유를 듣고 난 며칠은 엄마에게 틱틱거렸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엄마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에 이야기할 수 없었다. 결국에 선생님은 어느 정도 엄마에게 그런 이해를 바라기를 포기하라고 조언했다. 그 조언이 짜증 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바뀌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지금 짜증 나는 그 조언을 받아들여 지내고 있다. 그러나 엄마와의 관계에서 부정적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관계에서도 그럴 수는 없다. 더군다나 친구와 연인 같은 평등해야만 하는 사이에서 말이다.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둔다면 내가 을임을 자처하는 일이다. 조금은 어렵더라도 나의 불편한 감정 표현을 하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오늘 같이 좋은 날에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인해 느끼는 우울한 감정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공격적이지 않지만, 상한 마음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연습은 꼭 필요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이렇게 말해야 할 사람의 얼굴이 적어도 세 명은 떠오른다. 모두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친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리 가깝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잘 표현한다. 나에게 중요도가 없는 사람은 안 봐도 그만이라는 마음이 작동하니까 무겁지 않게 말을 뱉을 수 있다. 하지만 소중히 여기는 관계에서는 그 사이가 틀어질까 봐, 또는 떠날까 봐 더욱 마음을 숨기게 된다.


나는 너무도 중요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사이에서만 그런 중요한 말을 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엄마, 연인, 아주 가까운  명의 친구와 같은. 하지만 정작 가장  이야기할  있는 대상은 그들이다. 내가 생각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소중히 여긴다면 용기  표현하는 불편한 감정에 응당한 반응을 해줘야 한다. 그게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아서 말을 꺼내기가 참 어렵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 한다. 정말 소중하고 편한 관계를 되찾든, 소중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좋을 때뿐이었던 관계를 정리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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