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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닮은 Apr 20. 2022

생각많아요 시기

오늘은 우울모드야?

언니가 툭-하고 말을 던지고 간다. 언니 딴에 내 기분을 살피는 위로의 말이다. 살가운 자매애 같은 건 없는 우리 사이라 이 정도의 말에도 살짝 감동을 받는다. 즐, 하고 어이없이 터뜨리는 실소를 지었지만 오늘은 우울모드다. 제대로 이유 있는 우울 모드니 타당성 있다고 생각한다. 잠만 잘 자던 근래였는데 최근 며칠 밤에 잠들기가 어렵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각성이라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게 되고 생각은 이어진다.


집 근처 호수공원 뷰가 기가 막힌 요가학원이 생겼다. 오늘 새벽에도 잠이 잘 오지 않아 알아 두었던 요가학원에 돈을 부쳤다. 12만 원. 첫 달 오픈 행사라 싼 걸까. 계속해서 이 가격일까. 궁금해하면서 오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12만 원이어도 고민하면서 등록했는데. 혼자 운동을 해도 된다 하지만 나는 의지박약이고,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운동 하나 등록해 놓고 다니면 적어도 계속해서 운동을, 더 나아가 다이어트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돈이 가진 힘이라고 여긴다.


늦게까지 밤잠을 설치고도 일찍 눈이 떠지면 '나 생각 많아요' 시기다.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생각많아요 시기는 조금 위험한 신호라고 여긴다. 잠이 잘 온다는 걸로 숨겨뒀던 속마음에 쌓인 불안이 정체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 버텼지. 이제는 이 시기를 담담히 맞을 수 있다. 난 요새 나와 잘 지내고 있다. 재촉하지도 않고, 혼내지도 않는다. 멍청하다고 자책하거나 업신 여기지도 않고. 그래서 내 몸 안에서 편히 지낸다. 날 유하게 대하고 있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거와는 또 다르게 불안은 살아 숨 쉬나 보다.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많아요 시기를 지내본다.


새벽에 등록한 요가학원에 앱을 설치하고 오전 10:20분 '이지 하타' 수업을 신청했다. 알람을 9시로 맞췄는데 한 시간 일찍 눈이 떠져서 끔뻑거리다 오늘 하루 능동적으로 살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생각많아요 시기답게 생각만으로 시간이 훌쩍 흘러 어영부영 출발해야 할 시간이 되어 요가복 위에 운동복을 입고 쪼리를 신고 나갔다. 요가를 배우러 가려면 꼭 쪼리를 신어야 한다. 5년 전 이사하기 전 집 앞 3분 거리에 요가학원을 다녔는데 거길 갈 때마다 신은 쪼리다. 노란색 오래되고 많이 신어 색이 바랜 고무 쪼리 부분이 조금 아프게 짓눌리는 그것. 그걸 신어야 요가가 시작되는 기분이라 이사 오고 처음으로 그 신발을 찾아 신었다.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걸어가도 안 늦고 도착할 시간인 줄 모르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두 정거장 뒤에서 내리면 돼서 대부분의 마을버스가 다 지나가는 곳인데 십 분이 넘도록 마을버스 한 대가 안 왔다. 약간 짜증이 나면서 지금이라도 걸어갈까 고민을 했지만, 운영정책에 적힌 '수업 시작 후엔 수업 입장이 불가합니다' 메시지가 두려워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몇 분 뒤에 버스가 왔고, 잠깐 앉았다가 두 정거장 뒤에서 내렸다. 새로 생긴 건물이라 반대 방향으로 걷다가 지도를 보고 돌아갔다. 이 건물은 이제 막 완공되어 입주한 가게가 3군데 정도뿐이었고, 주변엔 공사 중인 건물이 아직 있다.


단순하지 않은 건물 모양에 조금 헤매다 건물 3층으로 요가학원 수강생 같은 사람들을 따라 들어갔다. 아담한 사이즈에 말할 것도 없는 호수 뷰가 펼쳐졌다. 어제 오픈인데 벌써 텃세 부릴 것 같은 수강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사람들 다 호수 뷰 때문에 왔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동네가 필라테스는 그렇게나 많은데 요가학원은 찾기가 어렵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요가학원을 찾던 사람들이 호수 뷰에 홀딱 반해 등록한 거겠지. 전에 다니던 학원은 원장님이 엄하셔서 수업태도에 대한 주의를 주시곤 했는데 여기는 딱 반대 성향의 원장님이다. 호수 뷰에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은 나도 있지만 수강생들이 너무 시끄럽고 매너 없게 굴어서 불편했다. 자고로 요가는 조용히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수련의 일부인데.


한 시간보다 길게 느껴지는 수련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개운하고 기분아 좋았다. 이지가 들어있는 클래스라 많이 힘든 동작은 아니었겠지만 5년이나 지나고 오랜만에 해도 어색함 없이 잘 맞는 운동이었다. 이사 와서 요가학원이 없어서 많이 아쉬웠는데 이제라도 생겨서 반갑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눈 비비며 쪼리 끌고 가던 집 앞 요가학원만큼 잘 가르치면 좋을 텐데. 아직은 그곳이 더 그립다. 온전히 요가에만 집중하게 해주는 수련실의 조도와 온도 향 그리고 엄격하지만 잘 가르치시는 원장님까지. 아, 그리고 무엇보다 요가는 음악이 중요한데 여기는 가요를 많이 튼다. 난 요가할 때 듣는 인도 정통 음악 같은 게 좋은데. 모든 걸 다 충족하기는 어렵겠지. 그래도 여기 선생님도 괜찮은 것 같다. 중간에 마사지 도구로 등을 긁어주셨는데 난 오늘 그게 제일 좋았다. 내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호수 뷰는 정말 끝내준다. 다음 주엔 노을 지는 오후 시간에 수업을 들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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