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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닮은 May 02. 2022

호수공원

나는 아주 좋은 자연환경이 있는 곳에 살고 있다. 어려서도 도심이지만 자연경관이 가까운 곳에서 살았는데 어른들이 “너희는 이렇게 주변에 자연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아마 모를 거다,” 하신 말씀에 동의할 수 없이 난 그 시절부터 그것이 얼마나 좋은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사를 올 때 가장 걱정이었던 것은 자연 조망권이 없는 곳일까 봐였다. 그러나 그때와는 또 다른 어쩌면 더 마음에 드는 호수공원을 품은 신도시에 살게 됐다. 운동을 좋아하진 않지만 좋아해야만 하는 나는 걷기를 그나마 가장 좋아하고 즐겨하는데 호수공원을 집에서 나와 몇 분이면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른다.


최근에는 호수공원 뷰에 다시 꼭 다니고 싶었던 요가학원이 오픈을 해서 매일 아침마다 요가로 하루를 시작한다. 요가도 나에게 편안함과 고요함을 주는 억지로 하는 운동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인데 그 앞으로 펼쳐지는 호수공원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요가를 조금 힘들게 한 날이면 한 층 내려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이 없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신다. 지난달까지는 50% 할인행사를 했는데 두 번째 방문인 오늘은 행사가 끝나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인테리어는 나의 스타일이 아니지만, 내 스타일인 호수공원이 이렇게나 잘 보이니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커피도 맛있고.


요사이 나의 마음을 따라 산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요가가 끝난 후엔 호수공원을 두 바퀴 산책하는데 왠지 책을 들고 가고 싶어서 챙겨 왔다. 책 덕분이었는지 오늘의 요가가 땀이 나게 조금 힘들었던 덕인지 카페에 와서 커피를 마시는 사치를 누린다. 필터 커피를 마시고 싶었는데 할인행사를 마치고 나서 제값을 주고 마시기 조금 아까워서 그냥 머신커피로 주문을 했다. 역시 나는 필터 커피를 더 좋아한다.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이다. 부모님의 연애편지를 자녀들이 엮어 책으로 만든 것인데 그 시절의 이십 대는 도대체 어떤 시절을 보냈기에 이토록 시적이고 성숙한 문체를 구사한다는 말인가 싶어 생경하기까지 하다. 모든 감수성을 내가 이해하며 읽고 있는지 조차 알 데 없지만 술술 읽히는 남의 연애편지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아껴 읽고 싶다.


어제는 고등학교 시절 교생 선생님과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했다. 나보다 6년 선배인 고등학교 선배이자 친구 같고 언니 같고 자주 이모 같고, 가족 같은 감사한 분이시다. 나의 기쁨을 나보다 더 축하해주고, 언제나 나의 잘됨을 응원해주는 동시대의 선배랄까. 아주 조금 앞선 한 템포의 시절을 살고 깨달은 혜안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너무나 고마운 인생선배다. 내게 좋은 일이 생겼는데 나의 기쁨을 어떤 왜곡 없이 온전히 축하해줄 선생님이 생각나서 전화를 드렸다. 다행히 좋은 일이 생기기 전날 만나자는 약속도 했던 터였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에너지가 넘칠 수 있을까 싶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점도 있다. 선생님은 반대로 내가 자신보다 나이 어린 친구라는 점을 가끔 잊을 정도로 내가 차분하고 성숙하다고 말하신다. 신나는 축하를 받고 넌지시 던지는 삶의 조언 한 자락이 내 마음속에 머문다. “나는 다시 너의 나이로 돌아간다면, 느긋한 마음을 갖겠어.” 느긋한 마음이라. 혈기왕성할수록 갖기 어려운 그 마음을 나도 지금껏 소망해왔다.


“내 나이 즈음 살아보니 조금은 어린 나이에 남들보다 많이 이룬 사람들이 꼭 이 나이가 되어서도 행복한 삶은 아니더라.” 천천히 가도 조금씩 나아진다면 그것이 더 행복한 삶일 거라는 첨언. 흩어져서 모이지 않아 답답해하던 나의 마음에 천천히 느긋하게 나아지는 모습이 값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내가 느긋한 마음을, 천천히 누릴  아는 마음을 갖도록 지속시켜주는 것은 자연 조망권을 획득한 덕이 아닐까? 탄천과 호수공원 덕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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