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짓누르던 불안과 더불어 잘 지내게 된 이야기
우리 대학원은 비교적 짧은 4학기제인 대신 학기당 평균 12학점을 듣습니다. 입학 면접전형도 다른 대학원들과 차별화하는데, 지문을 읽고 이론과 기법을 적용하는(학회나 국가자격증 실기전형 방식) 전형적인 방식 대신에, 얼마나 성실한 자세로 임할 것인지를 중심으로 진솔하게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또, 여러 수업에서 공부한 바를 스스로 적용하고 분석하는 성찰 보고서(Reflection Paper)를 과제로 부여합니다(아주 많이). 그리고 발제(발표)를 합니다(꽤 자주). 수강 인원이 보통 20명 남짓이다 보니, 소규모 발제와는 달리 청중 앞에 서는 상황이 연출되는데, 발표불안이 높은 분들께는 난관입니다.
최근엔 상담연구방법론 수업에서 구조방정식을 활용한 연구 두 편을 발제했습니다. 다소 버벅댔고, 시간을 초과해서 조원께 폐도 끼쳤고, 그래서인지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한편으론 꽤 만족했고 오히려 기분이 고무됐습니다. 밈이 된 침착맨의 맛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내가 싫지 않은 느낌?" 정도가 정확합니다. 다음날은 직무와 관련한 민간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 면접전형을 치르는 날이었는데, 이 사실을 출근길에서야 자각했습니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서 부랴부랴 예상문제를 외웠고 일부 엉터리 답변을 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론 무난했습니다.
이렇듯 긴장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불안과 다투던 대학시절 생각이 납니다. 대학교 새내기 때 선배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는데, 병원에서 진정제를 투여하고도 떨림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대학생활 첫 발표 수업이 있었는데, 정말 끔찍했습니다. 전력을 생산할 수 있을만치 부지런히 떨고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횡설수설했습니다. 그 무렵 우울감이 심각했고, 발표는커녕 출석 호명에조차 대답하기 힘들었습니다. 점차 외출마저 힘들어졌고 그렇게 날린 학점을 채우고자 방학에는 계절학기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어느 겨울에 문화사회학이란 타과 전공 수업을 정말 재밌게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물살이)였습니다. 심리학과 달리 사회학 수업은 대부분 발제를 요구했습니다. 대학문화 중에서도 군사문화를 주제로 사회학 이론을 적용한 르포 형식을 빌려서 발제했는데, 걱정과 달리 떨리긴 했지만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함께 수강한 타인들과 교수님으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았고 이건 그저 괜찮은 경험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다시 연결하는 계기였습니다. 사회학을 부전공하며 발제와 토론이 익숙해졌고, 몇 번은 크게 망하기도 했지만 덕분에 자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발제 훈련은 지금까지도 활용하는 든든한 밑천과 자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발표불안에 대한 인지적 악순환 과정은 이미 상당히 규명됐습니다. 그만큼 현대인이 보편적으로 겪는 어려움이라 하겠습니다. 핵심 변인은 부적응적 자기 초점(적) 주의입니다. 상술한 폭행 사건의 목격자는 학과 동기와 선배 수십 명이었는데, 따라서 늘 누군가 나를 보고 수군대거나 나쁘게 볼까 봐 바짝 긴장하고 지냈습니다. 구체적으론 외출, 출석, 발제 등 사회적으로 노출되는 상황에서 증상이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계절학기에 다른 단과대학 강의실에서 열리는 수업을 들으니 견딜 만한 환경이 되었습니다. 나의 불안을 관찰하는 대신에 내용을 깊게 공부하고 비판적으로 전달하는 발제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학교 첫 발표를 시작할 때에, 손과 목 그리고 온몸으로 떨림이 번지자 이를 전적으로 나쁜 현상이라고 왜곡해서 인지했습니다. 폭행 사건이 촉발한 과대 각성 상태와 연결했기 때문인데, 꽤 오랫동안 그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척 지내고자 애를 썼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라는 조로(원피스 등장인물)의 몰골이 처참한 피투성이였듯이, 그렇게까지 부정한다는 점은 오히려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긴장과 떨림은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입니다. 전달력엔 방해가 되지만 순기능도 많습니다. 굉장히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는 거죠. 결혼식 축가 순서에서 확인하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는 진심은 타인의 마음을 울립니다. 또, 집중력이 높아져서 피곤을 잊게 합니다. 이런 인지적 탈융합(Cognitive Defusion)을 거치고 다시 떨림을 자각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싶구나. 자연스럽게 떨리는데, 거기엔 불안과 설렘이 함께 있겠지. 긴장한 모습이 청중에게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준비한 내용에 관심이 있을 거야. 기대한 것의 십 분의 일만 전해보자.'
지금껏 제법 많이 이직했는데, 신기하게도 합격한 면접전형에서 더 많이 떨었습니다. 기대가 크면 긴장도 커지지만, 이것이 꼭 나쁜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 듯합니다. 불안에 관한 이 수기가 누군가에게 위로와 힌트가 되길 바라며 이야기를 마칩니다.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