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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an 13. 2021

죽음의 정치성 그리고 당신을 위하여

로빈 캉빌로, 120BPM

120 Battemnets Par Minute, 120 Beats Per Minute, 2017, 프랑스, 123분



 대체로 우리들은 지금 이 순간 내 심장이 어떤 속도로 뛰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평소처럼 뛰고 있을 테니 관심 가지지 않는다. 성인의 평균 심박수는 70 정도라도 한다. 심박수가 120bpm까지 오르기 위해선 운동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사랑을 하는 등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운동성과 더불어 한 가지 의미를 더 내포하고 있는데,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89년도에 한창 유행하던 하우스뮤직의 비트도 120이다. 결국 어느 때보다 심장은 선명하게 뛰는 심장에 대해 말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공간과 하루를 채우며 말이다.


 <120BPM>은 급격히 에이즈가 확산되는 와중에도 무책임한 정부와 제약회사에 반발하는 ACT UP PARIS의 활동가들을 다루고 있다. 단체의 구성원은 대부분 에이즈 환자들이다. 설령 HIV 바이러스에서 음성을 판정 받은 이들이라 할 지라도 다르 이들의 눈엔 그저 에이즈 환자로만 비추어질 뿐이다. 영화는 ACT UP PARIS에 신입 회원들이 들어오며 시작된다. 함께하기까지 모두 개인적인 사정이 있지만 그들에겐 공동의 바람이 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더 발생하지 않는 것. 그리고 죽지 않는 것.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죽음 앞에 섰을 때야 삶을 실감한다. "나 아직 살아 있어?"라는 질문과 "나 아직 살아 있어."라는 대답을 반복하며 그들은 살아 있다. 그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투쟁을 택했을 뿐이다.


 영화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다. 감독인 로빈 캉빌로는 실제로 ACT UP PARIS로 활동했었고, 그 경험이 영화의 사실성과 깊이를 더했다. 그 깊이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도 하다. 당사자이자 목격자였다는 점에서 간과하지 않고 간과 당함을 말한다. 서사의 당사자성과 발화의 위치는 작품의 결을 결정한다. 특히나 쉴 새 없이 타자화 되는 인물들을 그려낼 땐 창작자의 명확한 스탠스는 대중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폭 넓은 해석과 감상을 가능케 한다.


 그들은 밤 늦게 핏대를 세우며 물러섬 없이 토론한다.  안건들은 끝이 없고 상황은 나아질 기미 조차 보이지 않지만 멈추지도 늦추지도 않는다. 공동체로서 함께 투쟁할 때 그들이 맞서는 것은 명백히 외부에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정부와 제약회사, 혐오주의자와 기득권층. 그러나 사실은 외부와 맞서기 위해선 내부에서도 치열한 대립이 필요하다. 같은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굳이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냐는 질문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겹도록 사람들이 말하는 '좋게 좋게'는 없다. 이루고자 하는 방향과 목표가 비슷할 순 있지만 세세하게 따지고 들자면 모두 다르다. 어느 누구와도 절대 같을 수 없다. 경험이 다르니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투쟁은 아주 개인적인 영역이다. 나를 관철시키는 작업과도 같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증명을 위해선 결국 투쟁해야만 한다.

 영화 속에선 토론 장면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팽팽하게 서로에게 맞선다. 그들이 밤 늦게 만나는 이유는 모두 각자의 삶과 생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단 한 번의 피로함도 드러내지 않는다. 토론은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다만 몇 가지 규칙이 존재한다. 발화자의 의견에 동의할 땐 핑거스냅을 할 것, 환자를 위해 담배는 복도에서 피울 것, 할 말이 있으면 복도가 아닌 들어와서 함께 나눌 것, 시간이 모자라니 말이 길어진다 싶을 땐 중단할 것. 활동가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다가도 금방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는다. 소란스러웠던 실내를 벗어나 그들이 하기로 결정한 행동을 하러 나섰을 땐 거침없이 하나의 목소리와 의식을 가진다. 각자 그리고 또 함께 한다.


 영화를 본 누군가는 비폭력 단체인 ACT UP PARIS의 행동이 과격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대체로 투쟁은 누군가에겐 과하고 폭력적이며 쓸데없는 짓으로 여겨진다. 당신이 기득권층이라는 증명이다. 폭력은 무엇인가. 누가 폭력을 휘둘렀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불편하고 번거로웠단 이유로 어떤 대상을 나쁘고 그르다고 취급한다. 행위에 대한 질문 없이 직관적으로 결론을 지어버린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지어 영역을 구분짓는 일은 그만둬야 한다. 불편할 수 있다. 불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단정 지어선 안 된다. 그 감정을 느낀 뒤에는 질문이 필요하다. 내가 왜 불쾌했고 불편했으며 그들은 어째서 반감을 감수하고 행동하는지 물어야만 한다.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도 있다. 단지 붉은 액체를 벽에 던지고 피켓을 들고 노래를 하고 구호를 외쳤을 뿐이다. 혐오는 누가 행하고 있는가. 혐오를 표출하는 사람들 중에 과연 투쟁하는 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에이즈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분노는 살아가기 위해, 세상을 구성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나 방향과 이유를 상실한 엉뚱한 분노는 대체로 약자와 소수자를 향해 있다. 무지와 오해는 타인을 파괴한다. 제대로 보아야 한다. <120BPM> 속 인물들이 끊임없이 앎을 요구하는 이유이다. 알지 못했기에 조금 더 잘 예방하지 못했으므로. 알지 못했기에 발생하는 공포와 불안을 떨쳐주려 한다. 목청을 높이고 끌려나가게 되더라도 그로 인해 누군가는 자신을 구할 수 있다. 외면은 최선책이 아니다.


 션은 영화의 축이 되는 인물이다. 계획했던 행동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도 션은 그것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의 성공으로 바라본다. 이 사고는 권리를 위해 혐오와 투쟁하는 이들을 향해 감독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응축되어 있다. 투쟁에 실패는 없다. 션은 열정적인 행동가다. 혐오와 폭력을 올곧은 시선으로 마주보고 대응할 줄 아는 인물이다. 션은 에이즈 양성을 진단 받은 후 자신의 삶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당시 에이즈는 공포 그 자체였다. 자신에게 닥친 일임에도 정확히 병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건 션도 마찬가지였다. 기약 없는 죽음을 선고 받은 것이다. 그와중에 에이즈가 동성애자들의 문란한 성 생활로 인해 발생한다는 무지에서 발생한 총체적 혐오가 다시 그들을 상처 입힌다. 어떻게 섹스를 해야 하고 어떻게 에이즈를 방지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마 그건 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안팎의 투쟁은 죽음 앞에서 시작된다. 내일 당장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120BPM>은 확고한 러브스토리기도 하다. 죽음과 사랑의 색채는 놀랍게도 비슷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사랑을 한다. 열정적인 션의 영향을 받아 단체 신입회원으로 들어온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던 나탄이 달라진다. 나탄은 에이즈 환자가 아니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에이즈라는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정부에서 내보내는 에이즈 경고 광고엔 게이 커플의 사진이 붙어 있다. 단 한 번도 매스컴에 등장하지 못했던 동성애자 커플이 일그러진 얼굴로 죽음을 내세우며 등장했다. 에이즈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불확실성이 주는 공포는 어느 무엇보다도 힘이 세다. 눈 앞의 호모포빅에 대해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던 나탄에게 션의 행동은 당연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투쟁하고 운동하고 사랑하는 그들은 춤을 춘다.


 ACT UP PARIS의 실제 슬로건은 dancing=life였다고 한다. 앞서 간략히 설명했던 대로 120BPM은 8,90년도에 유행했던 하우스뮤직의 비트를 의미하기도 한다. 비트와 심장이 뛰는 소리는 몹시 흡사하다. 120BPM의 비트는 투쟁과 사랑을 보여주기에 최적인 비트다. 살아 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일이 있다면 생을 실감하게 만드는 비트도 존재한다. 그들의 투쟁이 살아 있음을 알리는 투쟁임과 동시에 죽어감을 알리는 투쟁이기도 했다. 이러한 서사를 가지고 있는 영화에선 무게 조절이 관건이다. 자칫하면 굉장히 무거워지고 또 자칫하면 진지함을 잃을 수 있다. 영화의 무게를 적절히 조절하며 환기시키는 역할로 음악이 등장한다. 하우스뮤직에 맞춰 함께 춤을 추며 몸을 흔들고 웃어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들이 춤을 추는 동안엔 그저 선명한 심장소리만이 존재한다. 춤을 추는 것, 그것이 곧 삶이라는 말에 반박 할 수가 없다.


 최선을 다해 삶을 이야기했던 만큼 최선을 다해 죽음을 말한다.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을 행동한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죽음을 통해 최후의 발언을 한다. 그들은 혹시라도 죽음을 전달하는 목소리가 부고처럼 들릴까봐 걱정한다. 이것은 부고가 아니다. 이 영화 속엔 놀랍게도 죽음의 정치성이 들어 있다. 그들만의 애도가 들어 있다. 그들의 움직이는 애도는 춤을 추는 것처럼 역동적이고 심박수를 끌어올리는 일이다. 내 곁의 사람이 이젠 없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으며 어쩌면 나도 이제 곧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동안은 가속페달을 밟듯 가파르게 진행됐던 서사가 죽음의 장면 앞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느리게 흘러간다. 죽음의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촘촘하게 담아낸다. 알려주고 또 알기를 원했던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표정을 짓는다. 늘 그랬듯이 무대 뒤에서는 분주하고 어리숙 할지라도, 무대 위에선 명확한 얼굴을 한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산 사람을 위하여.


 다 준비됐지? 조심해. 너 자신을 책망하지마.


 그런데도 끝내 "나 아직 살아 있어? 아직도야? 이만하면 됐잖아."라고 울부짖게 된다. 죽음을 원하는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 잠들었을 때, 몰래 약을 주사할 수밖에 없다. 당신을 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끝내 이젠 이만하면 됐다고 말한다. 죽음이란 마지막 발화를 통해 침묵할 수 있게 된다.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 해 살아 있을 것, 죽음과 맞서고 투쟁할 것, 춤을 추고 노래할 것, 사랑할 것,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 것.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야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에 울음을 터트리는 이가 있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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