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기를 과소평가한다.
건강한 상태에서도 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심한 감기에 걸려도 ‘감기는 감기일 뿐’ 이라고 넘긴다.
그도 그럴게, 다른 병에 비하면 병이라 하기도 너무 민망하고 언제 나을지 보이니까.
널린게 감기 약이니까.
모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감기는 바보들만 걸려. 똑똑한 애들은 그런거 걸리지도 않아.’
미안하게 됐네요 어머니.
그러고보니 난 모친이 감기 걸린 걸 본 적이 없다.
엄마가 똑똑하긴 하던데.
내 기초 체온은 높다.
그래서 조금만 걷고 체온을 재면 자주 높게 나와서
코로나때 출입 제한되는 경우가 조금 억울했다.
그래도 조금 쉬면 정상체온 범위까진 들어왔기에 출입만 조금 늦어졌을 뿐이다.
문제는, 감기에 걸렸을 땐 40도가 우습게 넘어가는 시점이다.
이게 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람의 인체에 치명적이라서가 아니라,
40도가 넘어가도 어디 아프다거나 그러지 않고 멀쩡한 상태가 지속되어서 문제가 된다.
나는 모르는 고열.
그래서 가족들은 내가 감기에 걸리면 체온을 자꾸 쟀다. 겉으로 쌩쌩해 보이니까.
그 습관은 내가 성인이 되어서 물려받게 되었다.
감기에 걸린 날 하필 집에서 쓰던 20년 된 가정용 체온계는 고장이 났고,
결국 학원에서 체온을 쟀는데 하나는 28도가 나오고 다른 건 36도가 나왔다.
나는 한 번도 36도가 나온 적이 없는데.
둘 다 고장난 체온계였다.
하나는 아예 기능이 상실되었는데 계속 쓰는거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람이 오든 36도가 일정하게 나오는,
그러니까 나처럼 멀쩡한척 하는 체온계.
나는 모친 몰래 학원 외출증을 끊고 빠져나와서 약국으로 가 체온계를 구입했다.
비밀로 했던 이유는, 아파서 조퇴했다고 하면 또 모든 수업을 재끼고 내게 올 테니까.
39.9도.
매니저님이 내 옆에서 호들갑을 떨길래 쳐다보니 적이 놀란 표정이었다.
제발 내 앞에서 그런 표정 짓지 마. 짜증나니까.
곧장 병원으로 보내졌다.
접수를 하고 나서야 어질어질한 기운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평소라면 정신은 육체가 무식하다고 미워했고
육체는 정신이 나약하다고 서로 싫어했는데
이번엔 정신이 육체가 나약하다고 하고 육체는 정신이 무식한 놈이었다고 싸우고 있었다.
40.1도.
의사는 날 보다가 컴퓨터쪽으로 돌아앉아서는,
‘음. 열이 좀 있으시네요. 약을 드리죠.’ 하곤 2분여만에 날 내보냈다.
나는 그런 의사의 건조함을 사랑한다.
나는 그래서 의사를 좋아하지.
나는 집에 가면서 생명과학 시간에 배운 항상성에 대해서 떠올렸다.
고열이 나면 인체는 위협을 느끼곤 모든 신체 대사를 멈추고 해열을 시작한다고 한다는데.
혈액이 익는다나 헤모글로빈이 파괴되서 그런다나.
그러면 체온이 오르는 건 꽤 위험한 것이었구나 따위의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는데 감기는 여전히 과소평가되었다.
기억은 안나지만 집에 돌아와선 신발장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그걸 퇴근해서 발견한 모친은 놀랐다.
이쯤되니 누가 옳은건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