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게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프로토콜
지금 이 글이랑 최근 요근래 쓴 글들이 다 중간에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나 전개가 이상한 글들이 있는데,
요즘 글 교정을 거치지 않고 쓴대로 바로 올려서 글이 좀 이상합니다. 언제까지 이럴지는 모르겠는데, 브런치가 독촉을 해서 그냥 쓰는대로 바로 올릴거라 이해 부탁드립니다.
지구의 모든 중력이 온 힘을 다해 날 끌어당겼다.
시간이 급격히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나는 이전에 중력이나 관성력이 클수록 그곳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과체중인 것처럼 느껴지고 자꾸만 나를 말뚝에 묶어 놓은 것 처럼 시간이 늘어졌다.
나는 더이상 힘들지 않고 평화로운데
몸은 자꾸만 그대로 굶으려했고 뇌는 게으름을 피웠다.
나는 내 머릿속에서 이상반응이 일어났을 때의 대처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자해를 하고 싶으면 내 주변의 칼들을 치워버리거나
공황장애가 발생했다면 현재 내 주변에는 위험한게 없다고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면 되었고
우울하다면 망고주스를 마시거나 병맛더빙 유튜브를 틀어놓으면 된다.
그게 나만의 공식이었고, 앞으로 힘들면 이렇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든든했는데
어째 어딘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방법은 마치 내가 대처법을 고안해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표면적일 뿐 다른 의미에선 외면이었다.
‘이 현상은 내가 예민해서 혹은 정신머리가 약해빠진 스트레스로 얻은 결과다’ 뭐 이런 명확한 원인과 결과.
아픈데 본인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환자가 될까봐 두려웠다.
정확히는
내가 모친처럼 될까봐 두려웠다.
본인은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주변을 비정상적이게 만드는 사람.
정신과에 가는 것을 미루고 미룬 근본적인 이유는 ‘가서 상담해봤자 의사는 내게 해줄게 없어보여서’였다.
이전에 다녔던 백병원의 의사는 약 자판기였고, 우연히 들른 동네 정신과는 내가 느끼는 죄책감에 대해 “그걸 의심을 안해보셨어요?” 라며 자해에 가담을 했다.
상담을 받으러 가도 “모든걸 다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들을게 당연했고, 그러면 나는 또 ‘머리로는 알아서 이미 노력하고 있어요. 근데 그게 실행이 안돼요’라고 대답을 하겠지.
상사병이나 멍청한 사람에겐 약도 없었고,
막상 가더라도
“제가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동시에 애착을 갖던 상대에게서 빠르게 정을 털어내보겠다고 불륜에 가담을 하다가 드디어 굴레에서 벗어났는데 힘들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처방할 수 있는 약이 있을리가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약물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나는 “강해지는 것”에 굉장히 맹목적인 인간이었다.
그러나 너무 단단하면 더 쉽게 부서지는 법.
나는 결국 버티다 버티다 학원을 무단으로 뛰쳐나와서 강남 한복판에 널리고 널려서 엉겨붙은 성형외과들 틈에 널리고 널린 정신과들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초진을 접수하고 검사지가 10장이 나왔다.
진료를 기다리는데에도 걱정이 계속 되었다.
분명 첫 마디가 “어떻게 오셨어요?”일텐데 나는 거기에 대답을 할 자신이 없었다.
분명 “어…그게요…”라고만 말해놓고 눈만 굴릴게 뻔한데 의사는 나를 한심하게 볼게 뻔했다.
근데 내가 대답해야했던 건 그게 아니라 “10장 모두 작성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혹시 이전에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던 적이 있나요?” 에 대한 의사의 첫마디였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저 그런 질문이었겠지만 내게는 저 질문이 의사와 대화하는데 능숙하게 사람인척 연기를 할 수 있는 쉬운 대답이었다.
“아, 네, ##병원이랑 &&병원 다녔었고요, 각자 다른 병력으로 내원했던 기록이 있고, 마지막 진료가 2020년이었어요.“
한층 사람다운 똑부러지는 답변 아닌가.
의사의 진료는 마치 추위도 모르고 스키를 열정적으로 타고 난 후에 마시는 마시멜로 토핑이 있는 핫초코 같았다.
상담을 하다보니 새삼 머릿수가 많을 수록 좋아지는 것도 있긴 하구나 느껴졌다.
그러니 나는 부자연스럽게 “저는 평소엔 만성적인 외로움 빼곤 다 괜찮았는데요, 랜덤채팅으로 만난 어떤 나쁜놈이 혼인사실을 숨기고 저랑 쳐자다가 저까지도 결국 불륜을 저지르고 상실감이 너무 큰 나머지 미어진 가슴을 꿰매보겠다고 내원했어요.” 라는 천박한 답변을 내원하게 된 결정적인 경위로 억지로 꺼내지 않아도 되었다.
의사의 질문은 자연스러웠고, 나는 ‘물’같은 사람이라는 평에 맞게 녹아들었다.
가령 의사가
정신과를 고등학생때 처음 갔네요? 무엇 때문이었나요?
라고 물을 때 내가 다소 방어적으로 모든 세부 정보를 묵살한채 ”학업 스트레스요“ 라고 대답을 했다면 묵살당한 세부 내용을 꺼내게 만들었다.
그러면 나는 어느새
“안되는 머리로 공부를 잘해보겠다고 노력해서 성과를 거두었는데, 부모님은 겉으로 기대를 안하는척 해놓고 간접적으로 압박을 주는 등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요“ 를 시작으로
구구절절 흐트러진 문장을 서툴게 이어붙여서
마지막에 심한 자해로 피떡이 된 몸으로 쇼크에 응급실에 실려가게 된 내용까지 설명하게 되었다.
나는 병원에 오기를 꺼려하다가 결국 오게 되어버린 경위에 대해서 설명했다.
매번 애착을 가졌던 사람과 헤어지는게 오히려 이대로 그냥 죽으러 가고 싶어질만큼 두렵고
매번 다른 형태로 찾아오는 외로움을 제어하지 못해서 현재 있던 곳을 뛰쳐나가는 행위를 한다고.
오늘 오게 된 것도, 사실 재수중인데 몰래 무단이탈을 해서 온 것이라고.
당연히 사람과 유대감을 형성하지 않으면 해결될 문제란걸 알지만, 지금은 외로워서 이 방법은 현재 쓸 수 없으니 혹시 내게 추천해줄 수 있는 대안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그러니 내가 가진 불안정한 애착 상태에 대해서도 부모님의 학대 사실은 자연스레 드러날 수 밖에 없었고 의사는 더이상 덤덤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과외 선생님 같았다.
어려운 문제를 서스럼없이 풀고 성적도 좋아, 똑똑한 아이인줄 알고 가르치다가 쌩기초도 모르는 아이인 것을 알아버리게 되어버려 과외를 그만 두고 나를 떠나버린 선생님.
혹시 이 의사도 내가 괜찮은 사람인척을 연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근본적인 심리의 뿌리가 상한 환자라고 진료를 포기하진 않을까 그런 터무니 없는 의심을 계속 했다.
근데 다행히 ‘어린나이에 안타깝게도 이 환자는 틀렸네. 버려야겠다’라는 표정이 아니라
‘참담하다, 힘들었겠다’의 표정이었다.
나는 내 행위에 모든 이유와 판단의 근거, 문제 상황 대처에 맞는 방안이 분명히 존재해야 했다면, 의사의 의견은 무조건 약물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시도는 좋으나, 뇌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어느정도 제어가 필요할 땐 약의 효과가 뛰어날 수도 있다는 것에서 나와 무척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총명하고, 예리했다.
내가 제시하는 단편적이고 방어적인 말들에서 파악하는 사건의 정황이나,
먹어본 약들의 종류 중 나의 의지로 복용해보지 않았을 약 하나를 바로 알아챈다거나
내가 알려주지 않은 어떤 심리 상태 등등.
그러니까, 내가 고민해야했던 자존감이나 상실감, 외로움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의사의 몫이었고,
나는 오로지 처방받은 약으로 뇌의 호르몬을 조절해서 수면 위로 올라올 생각을 해야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대화 두 개.
의사: 친한 친구가 죽고 싶다고 그러면 옆에서 계속 말걸어주고 도와주려 하는 것처럼 본인을 아껴보세요. 지금까진 방법을 몰랐지만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거에요.
나: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의사: 본인이 자기를 아끼는 상태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의존성이 높아지고 위험해져요. 거기서 발생하는게 이제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는거고요.
의사: 나는 항상 내 편이어야 해요. 설령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요.
나: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게 되나요
의사: 반드시 그래야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 중요한건 끝까지 나에요.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