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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열 Jul 22. 2024

사랑이 식었어ㅠ


은이를 무책임하게 버려버리고 난 다음 날 부터

잠에 관한 습관들이 다시 발현되었다.

이를테면 알람이 울릴 때 경기를 일으키며 깬다거나

쉬는 시간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누군가가 깨우면 크게 놀란다거나.


전자는 아침에 다시 잠드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뭔갈 알려주러 온 친구나 선생님도 같이 놀라곤 했다. 그러면 나는 상대방에게 미안해지면서 동시에 은이가 생각이 나면서 잠시 슬퍼진다.



관계가 끝난 마당에 인스타 염탐 같은 것들을 왜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그가 내게 팔로우 요청을 해오면 나는 잠깐 정신이 산만해진다.

잊을때쯤엔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토끼 코스튬이 뒤늦게 도착해서 2차로 산만해졌다.

코스튬을 당근하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왜 그는 내가 토끼가 되길 바랬을까


온순해졌으면 좋겠어서?

조루가 되었으면 좋겠었나

아니면 그냥 내가 아무 말 없이 조용해서?


생각해보면 은이는 전남친과 많이 닮았다.

AB형, 씹덕, 마른 체형

팔이 귀엽다는거(깨물면 맛있다는거)

별 보는 것도 좋아하고 지구과학을 좋아하고.

아재개그도 좋아하고 intj라는거.

연락을 참 안하는 거.

내가 한 말들 하나도 기억 못하는거. (안해주는건지 못해주는건지)

내가 좋아하는 거 하나도 기억 못하는거.




은이가 내 삶에서 점점 멀어질 때 혜림이는 어느순간부터 내 생활에 고의적으로 스며들었다.


점심을 먹을 때도

수업을 할 때도.


어느 날 혜림이가 내게

“언니 오늘 일찍 조퇴하는 날이죠?“라고 했을 때 나는 잠시 놀랐다.

“응? 어떻게 알았어??“

“언니에게 관심이 많아서요! 저번에 알려주셨잖아요ㅎㅎ“ 웃으며 말하는 혜림이는 귀여웠다.


동시에 나는 은이가 생각났다.

은이는 이런거 매번 기억 못했는데.

맨날 기억 못해서 매주 물어보면 매주 대답해줘야했는데.


사람은 단 한 사람과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맺어오면 어느새 그 사람이 세상이 된다.

내가 이러는 것 처럼.

나는 미안하게도 다른 사람들도 은이와 비슷할거라고 생각했다.



혜림이는 가정에서 사랑을 무척 많이 받아온 태가 나는 아이였다.

교실 에어컨이 추워서 혜림이를 안고 있거나

혜림이가 겉옷을 빌려줄 때 입으면 맡아지는 옷 냄새가 그것을 증명했다.

혜림이가 말해주는 가족 이야기는 무척 화목했다.

그러니 당연히 포옹이나 스킨십에 거리낌이나 낯설어하지 않았고

친절이나 여유가 내가 지금껏 봐온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나는 처음으로 어쩌면 정에도 종류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필요했던 것은

은이나 전남자친구가 주는 그런 부실공사로 만들어진 정이 아니라

튼튼한 설계와 철골로 빌드가 된 정.


저녁을 먹고 혜림이와 산책을 하는데 대화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방어기제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미안해진다.

이를테면 이런 거.


혜림이: 저는 이런게 재밌어요.

나: 그래 너 많이 해. 난 싫어해.

혜림이: 힝…사랑이 식었어 ㅠ


그리고 ‘사랑이 식었어ㅠ’라는 말은 내가 은이나 전남자친구에게 서운함을 표출하기 위해 꽤 장난스레 잘 쓰던 표현이었는데

혜림이가 이 말을 해주니 영 기분이 묘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해준 적이 없고 내게 무관심했는데

아무런 연고도 없던 친해진지 몇 주 안된 아이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섭섭하면서도 혜림이를 자꾸만 껴안아주고 싶게된다.


은이가 보고싶으면서 그가 한 짓을 생각하면 영원히 안보고싶다.

혜림이랑 공부하다 보면 은이를 잊을 수 있을까.

어차피 걔는 날 안보고싶어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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