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엄마가 있다. 나는 "엄마"라고 말했고, 남들은 "할머니"라고 하는 내 엄마. 내게는 기억나는 순간부터 엄마였는데 남들은 기억나는 순간부터 "할머니야. 엄마가 아니라."라고 말했던 내 엄마. 어린 시절에는 우기듯 "엄마"라고 불렀는데 커가면서 알았다. 할머니가 진짜 나를 낳은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 그 어떤 엄마보다 사랑으로 키우고 있지만 진짜 나를 낳은 엄마가 아니라서, 내게 평범한 가정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
그래도 난 "엄마"라고 불렀다. 30이 되어도 "엄마"라고 불렀다. 그건 마치 세상에 대한 반항과도 같았다. 그런데 아이를 낳았고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는 나를 보며 어린 시절의 나처럼 아이가 혼란스러울까 봐 호칭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할머니~" 정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노력했는데, 3살 된 내 아이가 나에게 "내엄마!! 엄마!! 엄마엄마 내엄마!!" 할 때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때로는 짜증이 났다. 질투가 났다. 왜 그런지 몰랐다. 그냥 내가 바빠서, 피곤해서, 지쳐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진짜 오래 갖고 있던 상처들이 치유되면서 이것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나를 애타게 찾는 아이에게 자꾸 미운 마음이 올라와 왜 그런지 깊이 내 내면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응답 없던 내면아이가 터뜨리듯 말했다. "내 엄마에요!! 내 엄마!! 내엄마라고요!! 할머니가 아니라!! 내 엄마라고요!! 누가 뭐라든, 뭐가 어찌 됐든 내 엄마에요!!! 내 엄마!!!" 그 말과 함께 폭풍 눈물이 흘렀다. 꺼이꺼이 울었다. 남들이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야"라고 할 때 싸해지던 분위기, 온몸에 꽂히던 측은한 시선. 그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애써 내 엄마임을 증명해보이려던, 우리 엄마의 어깨를 높여주고 싶었던 모든 순간의 노력들. 애쓴 삶의 흔적들. 남들이 보는 시선이 의식되는 어느 순간부터 점점 더 당당하게 "내 엄마예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괜찮으려 애썼던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말. "내 엄마예요. 내 엄마!! 내 엄마라고요. 내 엄마!!!!!" 이 말을 하며 엉엉 울었다. 목놓아 꺼이꺼이 5살의 아이가 억울해서 울듯 꺼이꺼이.
그렇게 한참을 울다 보니 아이에게 고마웠다. 아이를 통해 내 과거를 마주했으니까. 그리고 내게 고마웠다. 치유를 하고 있어 이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리고 우리 엄마에게 가장 고마웠다. 엄마여서 다 알았을 테니까. 내 마음을. 그 과정을 어찌해줄 수 없어 묵묵히 지켜봤을 테니까. 하늘과 같은 사랑이 있다면 이런 사랑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사무치게 죄송하고 감사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내 엄마!!! 내 엄마!!!내 엄마!!!"
엄마는 다소 어안이 벙벙해했지만 이내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내 딸!!!!!! 내 딸!!!!!!! 내딸 내딸 내 딸!!!!!" 그러자 우리 아들도 신이 나 외쳤다. "내 엄마!!!!내 엄마!!!내 엄마!!!!!"
엄마가 갑자기 왜 그러냐 물으셔 아들이 "내 엄마 내 엄마 하니 나도 내 엄마 생각나서 그랬어!" 라고 말했다. 아마도 내 모든 마음을 그 몇 마디로 눈치채셨겠지. 그렇게 실컷 엄마를 부르고 나니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웠다. 30년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듯했다.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기뻤다. 너무너무 기뻤다. 진짜 내 자리를 찾은 것 마냥 힘들어했던 내 삶의 조각들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기쁨이 온몸을 감았다. 참 다행이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아이가 어릴 때 내 내면을 마주할 수 있게 돼서. 참 기쁘다. 엄마와 나와 우리 아들이 만날 앞으로의 나날들이. 그리고 나를 위한 피자를 먹으며 아들과 깔깔깔 호호호 웃으며 신나게 먹었다. 3살의 내가 3살의 아들과 웃듯 즐겁고 기쁘게. 행복하고 편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