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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ppy Mar 23. 2021

봄의 전령사가 가장 먼저 다녀간 곳

'칠십리 시공원'






이른 봄을 들이며







사계절을 지닌 우리나라는 참으로 신의 은총을 받은 나라임이 틀림없다. 어릴 적에는 지구 상 모든 나라가 당연히 사계절을 가지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나는 꽤 기나긴 시간 동안 딱히 고마움 없이 각 계절들을 내 멋대로 편식하며 지내왔다. 이 축복받은 다양한 계절성에 감사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점점 짧아지는 봄과 가을은 마치 나에게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특별 이벤트와 같아서 집순이인 나조차도 바깥으로 이끄는 아주 귀한 계절이다. 계절이 바뀌는 순간은 언제나 발치에서부터 올라오는 짜릿함과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동반하는데, 계절이 바뀜을 알아차릴 수 있는 신호를 처음 받았을 때가 이 느낌이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올해는 출근길에 우연히 마주한 우리 집 앞에 피어난 수줍은 매화를 처음으로 발견하면서부터 그 신호가 시작되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긴긴 겨울을 지나, 드디어 봄. 네가 와주었구나- 매서운 추위에 굳어서 멈춰버린 내 가슴속 한편에 봄, 너라는 아이를 들이면서부터 다시금 내 심장은 뜀박질을 시작했다.





봄의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었다







봄은 그 누구보다 따스하지만 참을성이 많지 않은 친구이다. 마치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신기루처럼 항상 아쉬움과 그리움을 동반하는 이 계절을, 나는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봄의 전령사가 이미 서귀포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나는 당장 가벼운 채비만 하고 서귀포 칠십리 시공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보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니 생전 처음 보는 규모의 게이트볼장이 펼쳐진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겨울이 머물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들 가벼운 차림으로 스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평화롭던지 속 시끄러웠던 내 마음속 소리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급하지 않고,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서 저마다의 할 일을 묵묵히 해 나갈 뿐이었다.





당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봄 제주








오른쪽으로 문득 시선을 돌리니 쪼르르 나 있는 돌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궁금증에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다 보니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귀포의 장면들이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바다내음이 따스한 봄바람과 하나가 되어 온 몸을 기분 좋게 감싸오니 이것이야 말로 더할 나위 없는 삶이 아닌가! 낮은 시선에서 가까이 바라본 풍경은 ‘삶 그 자체’ 였다면 높은 시선으로 멀리서 바라본 풍경은 ‘희극’ 이였다. 그 현실감 없는 전체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봄이 와서 기분이 좋았던 신선 한 명이 이 하늘에서 내려와 붓을 들고 한껏 실력을 뽐내다가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재미난 상상을 하며 잠시 숨을 갈무리했다.






작가들이 사랑한 제주의 모습을 잠시 엿보며







공원에 안쪽으로 들어가면 깔끔하게 정돈된 산책길이 나오는데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하게 여유를 만끽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박석이 깔린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작가들의 시가 새겨진 시비들을 볼 수 있다. 탐라를 사랑했던 작가들의 시에선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제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하나하나 시비들에 적힌 시와 노랫말을 나지막이 읊조리다 보면 들릴 듯 말 듯 귀에 맴도는 차분한 내 목소리가 꽤나 듣기 좋다.






동해 끝 적시던 물소리, 서귀포에 와서는 묵언 중






서귀포에서의 일상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인, 김용길의 시가 작가의 길을 걷고 있던 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바쁜 일상에서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려가다 보면 내 발치에 무엇이 치이는지, 내가 밟고 있는 땅이 어디인지 모를 때가 정말 많다 소중한 것은 소중한 발걸음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또 한 번 느끼며 잠시 박석에 새겨진 이 시를 음미하듯이 읽어 내렸다. ‘서귀포에 와서는 묵언, 서귀포와의 인연, 발끝에 묶나니’ 딱 지금의 내가 시고, 시가 나인 것이 아닌가! 저 멀리 있는 서귀포 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 때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모든 걸 멈추고, 그저 고요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묵언하는 것. 그렇게 나는 봄이 온 어느 날의 서귀포에서 나도 모르게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추웠던 겨울의 장벽을 깨는 폭포의 우렁찬 소리







사색에 잠겨 정신없이 걷고 있던 내 정신 수면 위로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고요했던 정적을 깨트렸다. 나는 번뜩 정신이 들어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서 씩씩하게 겨울 장벽을 깨고 있는 천지연폭포의 우렁찬 폭포 소리가 아득한 노랫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폭포의 가까이서 보았을 땐 보이지 않았던 한라산의 자태도 병풍처럼 폭포 주변을 웅장하게 감싸고 있었다. 한라산 꼭대기에 쌓여 있는 눈의 모습이 없었다면 미련 가득한 겨울이 이미 지나가버린 줄로 착각했을 것이다. 한 공원 안에서 바다, 폭포, 한라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경험임은 틀림없다. 어쩌면 다신 오지 못할 순간일 수도 있으니 이 순간, 이 모습을 영원의 눈에 담아본다.





서귀포를 아시나요. 봄의 서귀포는 어떠한가요








서귀포를 배경으로 만든 노랫말이 빼곡히 새겨진 시비는 재미난 모양에 구멍 사이로 보이는 한라산의 모습까지 완벽한 서귀포 그 자체를 잘 담아내었다.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 속에서 악착같이 삶을 살아내는 강인한 내 고향 그리운 서귀포!  내게 제2의 고향을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서귀포를 외칠 것이다. 생소하지만 그립고, 아름답지만 아련한 이곳. “밀감향기 풍겨오는 가고 싶은 내 고향 칠백 리 바다 건너 서귀포를 아시나요. 동백꽃 송이처럼 어여쁜 비바리들 콧노래도 흥겹게 미역 따고 밀감을 따는 그리운 내 고향 서귀포를 아시나요.”






그저 나는 바라볼 수밖에






칠십리 시공원에서 인내심을 갖고 깊숙이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이 작은 호수는 소소한 행복을 주기에 충분하다. 내가 본 것이 모든 것이라고 믿고 도중에 나와버렸다면 나는 이 작고 아담한 장소를 알지 못한 채 내가 본모습이 이 공원에 다인 것 마냥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공원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고 싶다면 작가의 길을 지나 잔디밭을 걷고, 시비들을 충분히 감상해라. 맞는 길인가 하고 의심이 들어도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면 귀중한 장소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다리의 끝에 서서








호수 주변을 배회하며 걷고 있자니 호수 한가운데에 한 남자가 멍하니 서 있었다. 푸른 하늘, 작은 호수,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섬처럼 떠있는 사람까지. 마치 짠 것 같은 완벽한 삼위일체는 동화책 표지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인위적이면서도 실제 했다. 말없이 호수 한번, 하늘 한 번을 쳐다본 그는 그 다리를 꽤나 지난 시간 에서야 전부 건넜다. 막상 내가 건너보니 행여나 빠질 염려로 하늘은커녕 발치에만 집중하게 되었지만. 다리를 건너 아까 그 사람이 멈췄던 그 지점에 도달하니 거울로 된 문이 있었고, 그 문 하나 사이로 바라보는 문 앞과 문 뒤에 풍경은 미묘하게 다른 공간에 느낌이 들었다. 방향만 바꾸어 바라보았을 뿐인데 이토록 다른 풍경이라니! 시선을 바꾸면 많은 것을 볼 수 있음을 또 한 번 깨달으며 마저 넘지 못했던 남은 다리를 전부 건널 수 있었다.






하늘을 담는 호수 거울, 오늘의 하늘은 이런 모습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짧은 시간, 많은 풍경,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던 칠십리 시공원. 그 한편에서 한적하고 고요하게 반짝이는 호수는 편견 없이 모든 만물을 순수이 담아낸다. 그동안 쌓아왔던 것들을 물 위에 던져내어 잠시나마 비움의 시간을 가져본다. 비움이 있기에 새로움을 채울 수 있음을. 그 비움을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이 공간에게 나는 이 글을 통해 소소한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





by. choppy

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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