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의무를 갖는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의무를 갖는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의무를 갖는다
_김경,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김훈 인터뷰 중에서 p154
관계를 지키고 싶어도 상대의 마음이 나와 다르고, 자존감을 지키고 싶어도 줄기차게 거부만 당하는 날들이.
꿈을 생각하며 희망으로 가득 차다가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처참한 생활고에 확신을 잃어가는 날들이.
존중감이 서려있지 않은 태도 속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삼켜야 하고,
현실의 냉담함 속에서도 의연해야 하는 날들이 말이다.
언제나 스스로의 판단에 확신이 차 있고 타인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는 개썅 마이웨이 정신을 가진 자라면
이 책을 꺼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멘탈은 순두부이기에
삶을 견뎌낼 단호함, 단단한 자기 확신이 없었던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었고, 그렇게 한동안 동고동락하며 지냈다.
평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일상에서 겪지 못한 세상으로 데려가 주는 소설로 현실 도피를 가거나, 모두와의 연락을 중단하고 아주 조용히 울었다. 직장을 다닐 땐 일에만 몰두했고, 퇴사 후에는 철학책을 찾아 읽었다.
단지 행복하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더 많은 세상에서 방향을 잃고 내몰리는 게 싫었다.
하지만 도피를 떠났다 와도 현실로 돌아오면 ‘나의 문제’는 다시 반복됐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예민해서 격렬하게 느끼는 것이고, 너무 섬세해서 일어나지 않는 부분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며, 지금 느끼는 이 불의와 실망감은 나뿐만이 아닌 사회인 모두가 견디는 것이고, 지금은 납득이 안 가더라도 시간이 지나 결과로만 봤을 땐 상대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고, 이 현상을 지키는 게 평화로운 정답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사람을 사랑하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그랬을 테지만 -
모두가 수긍하는 ‘정답’이 따로 있다고 여겼던 시간이 있었다.
내 생각이 틀릴 수는 있어도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가 좋은 ‘최선의 답’이 따로 있다고 말이다.
항상 그 ‘최선의 답’을 얻기 위해서 나 자신의 판단을 의심했고, 나 자신의 감정과 자아를 배신해야 했지만 답이 있으면 됐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었다. 사람들과의 소중한 관계에서도, 적대적인 관계에서도, 중요한 업무에서도, 내 생에 매번 찾아왔던 선택적 순간들에서도 모든 게 완벽한 딱 들어맞는 정답은 없었다. 내가 되어야 하는 건 정답이 아닌 ‘나’였고 이 답을 완전히 소화시키는데 26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상대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일까? 모두와 같은 답안을 제시하는 사람일까? 화가 없어서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일까?
아니, 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공감능력 테스트 수치상 평균치보다 두 배 높고, 거짓말을 싫어하며, 동정심이 강하지만, 난 절대 순종적이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맡은 일이 향상되길 바라기에 항상 문제가 눈에 밟혔고, 사유하길 좋아했으며, 사람들에겐 ‘착하다’보단 ‘특이하다’ 소리를 더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불완전했다.
한 인간의 가치관과 생활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의 성장과정과 부모의 양육방식을 궁금해하는데 그 이윤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
대단한 포부나 큰 결단이 있었던 건 아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었고, 회사를 다니는 문제는
일단 책을 쓰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난 어떻게 그런 중요한 결정을 이리 쉽게 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의 양육방식 때문이었다.
나는 살면서 부모님의 강요에 부딪친 적이 없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 때 의견을 주시긴 했지만,
결국 내 선택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게다가 중학교 시절까지 공부는 안 하고 만화책만 본 나와 달리
언니는 전교 1, 2등을 하는 우등생이었지만
단 한 번도 언니와 비교당한 기억이 없다.
그 덕분에 나는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않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익숙했다.
물론 그런 내게도 부모님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부담감도 잘라냈는데
부담감이 크다고 사랑까지 큰 건 아니라 생각해서였다.
20대 중반 무렵, 밥을 먹다가 부모님에게
“나한테는 기대를 버리고 하숙생이라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당연 욕을 먹었으니.
기껏 키워놨더니 그게 할 소리냐고 하셨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날 하숙생으로 생각하라고 말했다.
물론 나라고 왜 수지 같은 딸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가능하다면 나도 부모님께 유자식 상팔자를 보여드리고 싶고
그게 안 된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마음이다.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부담감에 짓눌려 산다고 해도 부모님이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건 아닌가 안절부절못한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우리는 그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살아갈 뿐이다.
그 삶이 부모님의 기대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건
사랑이 아닌 채무감이자 강박일 뿐.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나의 몫이라면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부모님 몫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부모님에게 받은 경제적 지원에 대한 채무감이라면
살며 최선을 다해 갚으시라.
하숙비를 내야 하숙생이 되는 거다.
하지만, 우리 삶까지 저당 잡혀 살지는 말자.
우리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써야 할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p91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준 부모님 밑에서 자란 작가는 본인의 생각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 몇 년간의 하숙 생활 끝에 책 한 권으로 수지와 같은 ‘유자식 상팔자’의 삶을 안겨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유년시절은 불우했고, 나의 마음을 존중하지 않는 어른들과 함께였다.
존중 없는 관계 속에 자신감은 잃어갔고, 그래프의 굴절도가 심한 폭력과 가난, 외로움 가득한 인생살이에 선택되면서 상처 받은 마음을 치료하지 못한 채 남들이 제시한 의견과 책, 조상들의 지혜에 기대며 살았다.
그렇게 긍정적인 아이가 조울증에 시달리고, 관계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가족일 때도 있었고, 언젠가 찾아오길 기다린 엄마일 때도 있었으며, 스쳐 지나가지 않고 사랑한다며 다가와준 연인일 때도 있었고, 변치 않을 거라 믿었던 친구일 때도 있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많은 마음과 에너지를 주었고 단단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제일 혼자이고 싶지 않을 때- 혼자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진실한 마음을 주어도 허무하게 끝날 수 있다는 것을, 관계란 덧없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언제쯤 끝날까.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지길 원한 적은 없었지만 앞날이 평탄해지는 날이 오길 그냥, 하염없이, 무력하게, 기다렸다. 상처를 끌어안고.
삶은 나 아닌 다른 존재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과제의 연장선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람들과 세계의 문제에 눈을 돌리고 마음을 쓰는 건 가치로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구하는 일이 제일 먼저인 어른이 되어야 하기에 그녀는 자신의 지혜를 담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to do list>를 책으로 정리했다.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to do list>
비참해지려 애쓰지 않을 것
자신만의 문제라고 착각하지 말 것
스스로에게 변명하지 않을 것
모든 이에게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을 것
불안하다고 무작정 열심히 하지 말 것
인생에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상처 받지 않을 것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것
세상의 정답에 굴복하지 않을 것
주눅 들 만큼 겸손하지 말 것
지나간 과거와 작별할 것
필요하다면 버틸 것
나다운 삶을 살 것
당장 현실로 가져와 적용하기엔 고찰할 시간이 필요한 사상을 철학이라고 한다면 <to do list>는 자아에 바로 입력되는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SNS와 유튜브가 큰 인기를 끄는 스마트 정보화 시대에서 한국 작가의 책이 100쇄를 넘겨 스테디셀러에 오른 건 아주 희귀하고 기념비적인 일이며 책 한 권에 담긴 내용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문장이 됐다는 걸 뜻함으로 작가로서는 이보다 더 명예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거룩한 주장이 아닌 ‘이 땅 위를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단단한 응원’이기에 백만의 독자가 그녀를 자아 지킴이 원더우먼이자 효녀로 만든 것이리라.
‘네 말은 틀리고 내 말이 옳다, 내 생각이 정답이다!’라는 주관을 가진 자기 확신형 지인이 나에게 말했다.
“너의 징징거림을 가만히 들어줄 수 없어, 네가 힘든 건 다 너 때문이야.”
처음 이 말속에서 진리를 찾기엔 굉장히 어려운 문제임으로, 나의 자존감은 다시 상처를 입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반복적으로 문제는 나에게 있다고 말했고, 왜 나는 내 마음이 힘들 때조차도 내 존재를 지적당해야 하는지, 남이 던져놓은 주장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의 늪으로 미끄러져야 하는지 생각하며 나를 비판했다.
(이렇듯 조언이란 자칫 자존감이 훼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말을 할 때는 항시 유려하고 조심스러운 어투를 사용해야만 한다!)
과거에도 한 번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말속에 담긴 도리를 이해하기엔 내 인생의 너무나 스펙터클 해서 제대로 소화를 못 시킨 것도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바이러스 현상으로 백수 기간이 길어졌고, 뭐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심리적 압박감과 더 이상 취직과 퇴사를 반복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직업 공간을 찾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충돌했다.
아무 곳이나 입사할 수 없다는 당찬 포부는 반년에 걸친 취업 실패로 꺾이게 됐지만, 덕분에 성찰할 시간은 가질 수 있었는데 나는 내 판단에 확신을 얻지 못하고 상대의 말과 사회의 잣대에 흔들릴 때마다 종종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아주 조금 더 혼자인 나에게 용기가 생겼고 홀가분해졌다.
한동안 나의 자존감은 이 책 안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지 않도록, 모든 이에게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도록, 주눅 들 만큼 겸손하지 않고, 무엇보다 나다운 삶을 살아내는 일에 집중하도록 -
이 세상 모든 존재들에겐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할 응원의 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토록 진정성 있는 응원의 말을 해줄 사람을 삶 속에서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기에 우리는 글로서 소통한다.
만약 지금 나의 소중한 누군가가 ‘어른 살이’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이 책을 선물할 것이다.
시간을 잔뜩 들여 한 문장 한 문장 소화시키다 보면 스스로가 얹어놓았는지도 모를 어깨의 무게가 보다 가벼워지고, 장애물이 덮칠 때에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